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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Choice] <도플갱어(Dopplerganger)>

Doppelganger/쿠로사와 키요시/일본/2003/107분

'도플갱어'란 자기와 똑같은 분신으로, 그를 보게 되면 곧 죽음을 맞이한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도플갱어는 한 개인의 무의식이나 숨겨진 자아 같은 것들로 해석된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플갱어>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도플갱어는 숨겨진 자아 같은 것이 아니라, 동일한 육체를 가진 다른 자아다. 원래의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인공 신체를 개발하는 하야사키는 연구가 벽에 부닥쳐 괴로워한다.

회사에서 연구의 성과를 보이라고 닦달하자 하야사키는 거의 노이로제 증세를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하야사키는 자신과 닮은 사람을 본다.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의 집에까지 침입한다. 결국 분신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하야사키의 연구도 수월하게 풀려나간다. 그러나 분신은 연구실에 침입하여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하야사키가 쫓겨나게 만든다. 그리고는 인공 신체를 훔쳐내 하야사키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준다. 하야사키의 분신은, 평소 하야사키가 두려워하던 것들을 무심하게 해치우면서 앞으로만 달려간다.

현재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감독의 하나인 쿠로사와 키요시가 만드는 장르영화는 결코 장르의 자장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도플갱어>는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다. 아니 공포영화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도플갱어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말하지만, <도플갱어>는 그런 일반론에 머물지 않는다. 도플갱어는 단지 초자연적인 존재일 뿐 어떤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지 않는다. 도플갱어는 단지 하야사키가 잊어버리고 있던 무엇, 원하던 어떤 것을 일깨우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도플갱어는 애초의 하야사키와 별다른 연관이 없는 독립적인 존재다. 두 명의 하야사키가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주목할 것은 초반의 도플갱어가 아니라, 도플갱어가 등장하고 사라진 후 하야사키의 행적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도플갱어가 등장할 때 화면을 분할하여, 두 사람이 각각의 세계를 점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역에서 자신의 길을 간다. 하나가 사라진 후에도. 끊임없이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일필휘지를 보는 듯한 느낌의 영화다.

<도플갱어>는 2000년 <레슬러> 이후 3년만에 개막작으로 선정된 아시아영화다. <도플갱어>는 산세바스찬과 토론토영화제로부터 초청받았지만,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이들 영화제 진출을 포기하기도 했다. <도플갱어>의 이번 상영은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다.

김봉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