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외로움을 타는 선배가 한명 있다. 요즘 일이 힘든데 연애까지 힘들어서 그런지 어떨 땐 새벽에 아무 이유없이 전화를 하곤 한다. 이번 명절연휴에도 우린 어김없이 만나서 영화 보면서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말았다. 그리고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맥주 마시며 선배의 외로움 타령을 들어주며 보냈다. 다음날에도 명절이면 항상 하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의 명감독 회고전은 명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찾아서 보러오는 용감하거나 외로운 자들로 초만원을 이룬다. 올해는 브레송을 했는데 <당나귀 발타자르>란 보고나면 딱 세상 살기 싫어지는 영화를 보고는 나오자마자 선배한테 전화를 했는데 마치 연인한테 처음 전화하는 것처럼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아닌가. 세상 살기 싫어지는 영화를 본 흥분을 전화로 전달하는 나는 선배에게 중독된 게 틀림없어… 그렇다…. 남들이 보면 우린 영락없이 연애하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그 선배는 게이이다. 커밍아웃을 한 지 꽤 오래돼 동생들도 모두 알고 가족처럼 지내는데 가끔 우리집에 김치 담그러 올 때 보면 어느 언니보다도 잘 통하는 구석이 있다. 외로움을 못 견디는 게 선배의 단점이면 단점일까? 나는 그럴 때마다 퉁명스럽게 세상엔 얼마나 재미있는 게 많은데 왜 그러냐고 혼자서 노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다. 혼자 노는 경력 얼마의 여왕인 내가 친히 일러둔다. “만화책을 보라구. 아님 영화를 봐. 아님 책도 재미난 게 많아. 아님 인터넷…. 인터넷은 우리의 천국이잖아 재미있는 것들투성이라구….” 이런 이야기 백번 해도 선배에겐 안 통한다. 선배는 나처럼 활자화된 것들 아니면 만들어진 이야기나 이미지가 아닌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실물을 사랑하기 원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조니 뎁의 그 마사루틱한 연기에 열광하며 조니 뎁 원츄를 부르짖어도 선배는 앞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눈길 한번 더 주는 것을 좋아한다. 어쩜 그 선배는 용감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좌절을 모르는 사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 좌절과 실패를 두려워해도 실행하는 사람… 좌절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욕망에 정직하고 이기적일 만큼 솔직하고 난 외롭지 않아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힘.
<씨네21>의 조니 뎁 인터뷰를 보니 아이를 키워보니 자긴 30년 동안 헛살았다는둥 하며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 이름도 ‘릴리-로즈 멜로디’라고 지어두고는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다. 우리식으로 ‘매화 방울이’ 이 정도로 아무렇게나 해석하고 싶지만 여하튼 그런 예쁜(?)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자랑스러워한다. 그 청년도 자신의 사랑에 이기적일 정도로 용감하게 내뱉는다. 파파라치들이 자기랑 자기 마누라를 사진 찍는 것은 자기들이 어른이니까 용납하지만 자기의 아이를 찍는 자는 코를 깨물어 뜯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사랑에 정직한 사람들은 무엇에 빠져도 위선이 없다. 자기식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니 뎁도 아이가 해적을 원하다니 자기식의 해적을 보여준 것뿐이다. 느므느므 어벙한 표정으로 말이다. 연휴 동안 이와이 순지의 <쓰레기통 극장>이란 책에 나온 비디오 목록대로 빌려둔 비디오와 TV에서 한 영화들, <노다메 칸타빌레> 6권과 같은 신간 만화와 브레송의 더럽게 슬픈 당나구의 죽음과 극장에서 조니 뎁의 어벙한 표정 다 보며 흡족해해도 사실 조금 허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수많은 텍스트와 이미지보다는 인간이 그리운 것은 아닐까.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그 선배가 현명한 듯싶다. 오늘도 그 선배와 술이나 한잔 캬아….
선배 힘내라구요. 어디엔가 그 어벙한 해적은 있을 거예요. 선배 앞에 휘청휘청 걸어 올 거라구요….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sicksadworld@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