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쥐엄마는 더 잘했을까?
나는 새엄마 밑에서 자랐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힘들었겠네” 하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물론 낯선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나뿐 아니라 새엄마 또한 그랬겠지만, 사람들이 새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달랐다. 새엄마가 “힘들었겠네”라는 위로의 말을 듣는 일도 아마 드물 것이다. 남이 낳은 아이를 제 자식처럼 기르겠다고 결심하고 또 실제로 해낸 사람이니 얼마나 착하고 장한가 감탄할 만도 한데, 친척이나 이웃 중에 새엄마를 이런 시선으로 보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릴 적 우리 마을 성당 부녀회 아주머니들은 새엄마와 함께 살게 된 뒤 내가 성당에 나가지 않자 집 앞에 몰려와 “마귀야 물러가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마귀 들린 새엄마를 설득해 나를 주님의 품으로 이끌 심산이었겠지만 오히려 가정불화의 원인만 제공하고 말았다. 내가 성당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청소년부에 쓸 만한 남학생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아주머니들은 새엄마가 ‘팥쥐엄마’이기 때문에 내가 성당에 못 나가는 것이라 굳게 믿고 어떤 말을 해도 믿어주질 않았다. <콩쥐팥쥐>와 <신데렐라>가 세상의 모든 새엄마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던 것이다.
사정이 이쯤 되니, 새엄마가 남에게 손가락질당하지 않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영악한 나는 새엄마의 아킬레스건을 금방 알아챘다. 기타를 배우고 싶거나 캠프에 가고 싶거나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으면,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장수임과 최민정과 임수준도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내 또래 아이들이 요즘 무얼 하고 있다는 건 곧 그애들의 엄마가 아이에게 특정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얘기였고, ‘다른 친엄마들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있던 새엄마는 번번이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친엄마처럼 행동한다’는 건 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내 친구들의 친엄마 중에는 딸에게 대학교육을 시키는 건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새마을 어머니회에 참석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피아니스트가 될 것도 아닌데 굳이 피아노 학원에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새엄마가 ‘다른 친엄마들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품팔이를 해서라도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새마을 어머니가 되어 학교 행사에 얼굴을 내밀고 피아노 학원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새엄마는 주변의 친엄마들과 참다운 엄마가 되기 위한 경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모름지기 엄마는 이러해야 하는 것이라고, 사회가 강요하는 불합리한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까치발로 동동거리고 있었다. 물론 ‘모성애’라고 통칭되는 그 기준은 너무나 높아서 한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지난 추석 연휴에 방영된 추석특집드라마 <팥쥐엄마>(SBS)와 <혼수>(KBS2)를 보면서, 문득 새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두 드라마에는 나의 새엄마가 그토록 염원했던 ‘완벽한 어머니상’을 자랑하는 새엄마들이 앞다퉈 등장했다. <혼수>의 새엄마(김혜숙)는 남편과 사별한 뒤 자식 셋을 삯바느질로 키우면서 막내딸을 위해 8천만원의 결혼자금을 준비할 정도로 헌신적인 인물이다. <팥쥐엄마>는 한술 더 뜬다. 새엄마인 금순(박미선)은 죽은 남편이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남매를 친엄마보다 잘 돌봄으로써 마침내 친엄마인 혜숙(김청)을 무릎꿇게 만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벌인 엄마되기 경쟁에서 새엄마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간단하다. 아침을 꼬박꼬박 해먹이고, 아이의 치과치료를 챙기고, 학교 선생님의 부름에 즉각 응하는 등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반면 사회적 성취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요리에 취미가 없고, 회식을 일주일에 서너번씩 하는 혜숙은 비록 친엄마라 할지라도 엄마로서 자격이 없는 것으로 묘사됐다.
명절에 방송되는 특집드라마들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다시금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시라”며 당시 가장 이슈가 되는 가족문제를 다루곤 한다. 올 추석에 새엄마들이 맹위를 떨친 것은 이혼율이 급등하면서 이 땅에 새엄마들이 생길 확률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고, 제작진은 새엄마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편견을 버리자는 의미에서 이들을 ‘천사표’로 묘사한 듯하다. 그러나 두 드라마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삶은 안중에도 없는, 가부장적 모성관에 입각한 어머니를 ‘진정한 어머니’(친엄마)로 설정한 뒤, 이 기준에 부합하는 새엄마만 엄마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자식에 대한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살지 않는 새엄마들은 모두 ‘팥쥐엄마’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므로 기존의 시각에서 반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심지어 <팥쥐엄마>는 이런 식의 모성애를 발휘하지 않는 대부분의 친엄마들까지 싸잡아 비난했다). 낯선 아이와 ‘모녀’라는 이름으로 만나, 서로 사랑하는 법을 알아가기보다 ‘엄마로서의 의무’를 강요당하며 힘들어했던 나의 새엄마에게, 이런 종류의 왜곡된 헌신과 희생까지 강요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철없던 시절, 엄마에게 조금 서운한 일이 있을 때마다 ‘새엄마라서 그렇다’는 비뚤어진 생각을 하곤 했던 나 자신까지 포함해, 새엄마가 감당해온 모든 부당한 시선이 여전히 건재함을 깨달으며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이미경/ 자유기고가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