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신문 제19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48 ~ 1949
네오리얼리즘 최대위기
이탈리아 “국가 이미지 악영향 영화 수출금지” 안드레오티 법안 통과
화려한 시절은 가는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사면초가에 몰렸다. 정부와 가톨릭 교단의 ‘네오리얼리즘 죽이기’가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다. 1949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안드레오티 법안’은 위기에 처한 네오리얼리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네오리얼리스트들이 우려하는 것은 안드레오티 법안에 포함된 검열제도이다. 이 법안은 “우리나라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는 영화는 언제라도 해외 수출을 금할 수 있다”는 조항 등을 포함하고 있다. 비평에서나 흥행에서나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심각한 족쇄가 아닐 수 없다.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대한 탄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부와 교계는 보고 싶지 않은 이탈리아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대해 적대감을 숨기지 않아왔다. 예컨대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건거 도둑>(1948)에 대해 바티칸 신문 <오세르바토레 로마노>는 “가톨릭 단체의 자선행위를 바보처럼 묘사하고 이탈리아의 지저분한 면만을 보여줌으로써 조국을 모독했다”라고 주장했다. 루이지 잠파의 <어려운 세월>(1948) 개봉 때는 “조국의 불행을 폭로하려는 시도”라며 국회까지 들고나섰다. 반발은 영화계 안에서도 일어났다. 비전문 배우, 현지 로케이션 촬영 같은 네오리얼리즘의 제작방식 때문에 일자리가 줄었다고 생각한 전문배우들과 스튜디오 스탭들의 불만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이들은 이를 주요 빌미삼아 1948년 거리시위에 나섰다.
사실, 1945년 <무방비 도시>가 비평과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만 해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하지만 1947년 사회당과 공산당이 내각을 떠나고 우익인 기독교민주동맹이 새 내각을 조직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전 정부하에서는 네오리얼리스트들의 정치적 성향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화비평가 니콜라 치아로몬테의 말대로 “네오리얼리즘은 정부가 간섭할 수도 간섭하려 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새 내각은 창작의 자유는커녕 “이탈리아의 명예를 더럽히는”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극장사업 못한다
미국 대법원 독과점 인정, 10년 줄다리기 매듭
1948년 5월3일 미국 대법원이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의 독과점을 인정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반트러스트 판결을 내리기에 충분한 독과점 세력이 존재하며, 피고들의 영업 행위에서 거래를 제한하려는 행위가 발견된다는 등의 혐의를 선언하고, 이와 함께 피고들 소유의 모든 극장은 반트러스법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이로써 장장 10년을 끌었던 소송은 정부의 승리로 판가름났다.
이 판결에 따라 빅 파이브(파라마운트, 워너브러더스, MGM, 이십세기 폭스, ????????? 하나 추가 요)와 리틀 스리(유니버설, 콜럼비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극장 체인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빅 파이브는 자사 소유의 극장들을 모두 매각해야 한다. 이는 앞으로 이들의 사업 영역은 제작과 배급에 한정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화들을 묶어파는 것(block booking)도 금지된다. 그럴 경우 독립 상영업자들의 영업을 방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소송은 10년 전에 시작됐다. 1938년 법무성은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영화산업을 독점 지배하고 있다는 혐의를 잡고 소송을 시작했다. 첫 번째 소송 대상이 파라마운트였고 이는 빅 파이브와 리틀 스리 등으로 확대돼왔다. 법무성은 빅 파이브가 극장 체인을 소유하고 영화를 묶어팔며, 독립영화가 큰 개봉관에서 상영되지 못하게 방해해 반트러스트법을 위반하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리틀 스리는 극장 체인을 소유하고 있지만 다른 영화사를 시장으로부터 배제하는 데 협력한 혐의가 인정돼 소송의 대상이 됐다.
영화의 혁명가들 잇따라 타계
에이젠슈테인, 뤼미에르 이어 그리피스도 세상 떠나
1948년의 죽음을 기억하라! 영화의 아버지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2월11일), 루이 뤼미에르(6월6일)가 작고한 데 이어 7월23일 데이비드 W. 그리피스가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73살. ‘영화의 오늘’을 있게 한 혁명가였던 그리피스는, 하지만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다. 1931년 이래 그는 촬영현장을 떠나 있었다. 그래도 에이젠슈테인은 말년에 새로운 실험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지만, 그리피스는 다시 카메라 뒤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혼자 지내왔다. 외롭게, 쓸쓸하게.
<국가의 탄생>이 정점을 이룬 그의 영화인생은 <인톨러런스>의 실패로 급락하지만, 그뒤에도 그에겐 몇번의 영화(榮華)가 찾아왔다. <꺾인 꽃>(1919)으로는 “스크린의 셰익스피어”란 찬사를 받았다. <동쪽으로 가는 길>(1920)은 <국가의 탄생>보다 더 큰 흥행수익을 거두어 그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조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피스는 그 수익금을 자기 소유의 스튜디오인 마마로넥에 재투자한다. 이렇게 독립제작자의 꿈을 실현해가면서 그는 점차 영화를 예술보다는 비즈니즈로 사고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마인드에서 나온 기획들은 어느 것 하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잇단 실패로 스튜디오가 파산에 처하자 그는 파라마운트로 들어간다. 이제 그는 도리없이 스튜디오의 지시대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은 신통치 않았다. 1926년 파라마운트는 그와의 재계약을 거부했다. 그뒤 ‘아트시네마’로 자리를 옮겨 만든 <아브라함 링컨>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았지만, 1931년작 <투쟁>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뒤 누구도 다시는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었다.
배신의 대가인가?
로셀리니-버그만 커플의 <스트롬볼리> 외면 당해
1949년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감독하고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스트롬볼리>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맹비난이 쏟아졌다. 왜? 배신감 때문에! 미국 최고의 스타였던 버그만이 남편도, 아이도, 할리우드도, 미국도 다 버리고 로셀리니에게 가버리자 관객은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어왔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 탓에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했다.
1939년에 할리우드로 건너온 뒤 버그만은 단숨에 정상에 올랐다. 1940년대 중반 극장주들이 흥행성을 기준으로 투표로 뽑은 배우 순위 10위 안에 들 만큼 그의 지위는 확고부동했다. 그런데 1947년 뉴욕의 어느 작은 극장에서 본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이 영화들에 깊이 감동받은 버그만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로셀리니에게 “띠 아모”라는 문장이 포함된 편지를 보내 그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비서가 이탈리아어로 번역해준 편지를 읽은 로셀리니의 맨 처음 반응은 “버그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버그만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바로 답장을 썼다. 이렇게.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기쁘게도 나의 생일날. 당신의 편지는 가장 멋진 생일선물이었습니다. 난 당신과 함께 영화를 찍을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힘닿는 한 모든 걸 다 하겠습니다. 유럽으로 오겠습니까?”
두 사람은 1948년 여름 파리에서 만났고, 그뒤엔 로셀리니가 할리우드를 방문했으며 1949년 초엔 <스트롬볼리>를 찍기 위해 버그만이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버그만이 로셀리니와 동거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미국에 타전됐다. 버그만이 1948년 <잔다르크>에서 보여줬던 성녀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대중은 그가 아이와 남편을 저버렸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하지만 진정한 창작의 동반자를 찾았다고 생각해서인지 버그만은 미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고 있다.
감독보다 배우가 어울린다고?
오슨 웰스 <제3의 사나이>에서 주연보다 빛나는 연기
1949년 <제3의 사나이>를 본 관객이라면 오슨 웰스의 연기를 잊기 힘들리라. 영화 시작 수십분 뒤, 잠깐잠깐씩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주인공인 조셉 코튼보다 더 큰 여운을 남긴다. 해리 라임 역에 노엘 카워드를 추천한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의견을 물리치고 웰스를 캐스팅한 캐롤 리드의 선택이 옳았던 것 같다. 그럼 이제 우리는 오슨 웰스를 ‘감독’보다는 ‘배우’로 여겨야 할까? 그렇지 않다, 라고 오슨 웰스는 대꾸할 것이다. 연출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 웰스의 내면엔 언제나 그것이 요동치고 있다. 그에게 배우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상하이에서 온 여인>과 <맥베스>의 흥행 실패 뒤 웰스는 감독으로 할리우드에 설 자리를 잃었다. 특히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1946년 아내인 리타 헤이워드가 소속사인 콜럼비아를 조른 덕에 이 영화의 메가폰을 쥘 수 있었다. 그리고 헤이워드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영화를 찍을 거라면서 기자들 앞에서 그의 머리를 싹둑 자르는 ‘홍보 이벤트’를 벌인 다음 제작진을 이끌고 멕시코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부으며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콜럼비아 대표 해리 콘이 보기엔 결과물은 엉망이었다. 오죽하면 자신이 이해할 수 있게 줄거리를 설명하는 사람에게 1천달러를 주겠다고 했을까. 영화를 2년간 창고에 처박아두었던 콜럼비아는 1948년 재편집을 거쳐 개봉을 시도하지만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성적은 실망스러웠다. <맥베스>까지 실패하자 할리우드에서는 아무도 그를 감독으로 고용하려 들지 않았다. 반면 ‘배우’ 오슨 웰스의 입지는 달랐다. 그는 편당 10만달러를 받는 ‘잘 나가는’ 배우였다. 하지만 그는 배우로 성공할 생각도 연기에 전념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제작조건을 찾아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에 도착한 그는 얼마 안 있어 <오델로> 제작에 착수한다. 그리고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악한 마술> <여우들의 왕자> 등 각국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다. 그의 출연작 대부분은 별볼일 없었다. 하지만 워낙 ‘출연의도’가 분명했던지라 그는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돈’이었던 거다. 하지만 개중 <제3의 사나이>만은 예외로 남을 것 같다.
단 신 들
프랑스 “할리우드는 가라”
1948년 1월4일 프랑스 영화인들이 미국영화의 ‘침략’에 반대하는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미국영화의 수입편수가 급격히 늘고 있으며 이는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곧 프랑스 정부는 1946년 미국과 전쟁 이전의 쿼터제를 폐기하고 프랑스영화의 연내 상영일수는 16주로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블륌-번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 체결 일년 만에 미국영화 수입편수는 10편으로 늘었고 프랑스영화 제작편수는 91편에서 78편으로 줄었다. 그러자 영화인들이 이같은 시위를 벌이며 항의에 나선 것이다. 이번 시위에는 시몬 시뇨레, 장 마레 등이 참석했다.
<햄릿> 베니스영화제 스포트라이트
1948년 9월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의 <햄릿>이 베니스영화제 3개 부문을 석권했다. <햄릿>은 그랑프리와 함께 여주인공인 진 시몬즈가 여우주연상을, 데스먼드 디킨슨이 촬영상을 수상했다. 유명배우인 올리비에가 감독 데뷔작인 <헨리 5세>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인 <햄릿>은 영국과 미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할리우드 가뭄
할리우드의 영업 수익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1949년 할리우드 수익은 3360만달러로 이는 할리우드 사상 최고의 해였던 1946년의 1억1990만달러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특히 파라마운트의 수익이 급감했는데, 곧 1946년 3920만달러에 이르던 것이 330만달러로 열배가 넘게 줄었다. 또한 주간 관객 수도 9천만명에서 6천만명으로 줄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개봉편수는 되레 늘었다는 것. 이는 독립영화 제작자들의 약진에 따른 결과인데, 1945년 21편에 불과하던 독립영화사 1949년에는 113편으로 크게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