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춘향>은 한국영화에 무엇을 제기했나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열다
활동 초기부터 제작, 기획, 감독을 겸해온 신상옥 감독은 몇개의 “관념적인” 모델을 거쳐 영화기업 신필림에 이르렀다. <성춘향>(1961)은 이같은 전환의 “모두 다”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당시 <성춘향>의 흥행은 서울 상영만 38만명, 한국영화 평균 4만명을 압도하는 기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수치는 관념에서 실체로 도약한 신필림의 경이를 이해하는 손쉬운 해결법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대의 논자들이 질문했듯이, 흥행기록의 이면에서 “한국영화에 <성춘향>이 제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서울영화사라는 건 관념적인 것이었다. 배급해야겠다 생각해서 그냥 한 것이지. 지금은 우리가 배급도 하고 제작도 하고 다 하지만 옛날에는 배급회사가 따로 있었다고. 그럼 거기다 팔아먹고 하는 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힘도 없고, 자본도 없으니까 배급은 실패했고 그래서 제작일을 시작하게 됐다.
역시 제작회사로서 모양을 갖췄다 하는 건 <춘향전>(<성춘향>) 이후지, 모두 다. 가령 그전에도 호흡 맞춘 스탭이야 있었지만 월급 주고 고정 사원을 쓴 것은 <춘향전> 이후다. 그때 정동에 신필림인가, 신프로닥션인가를 채리고 있었다. 신인모집을 했는데 한 3천명이 왔다. 쓸 만한 게 없어서 성일이(신성일)밖에 못 뽑았는데, 지금 KBS 모집한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때는 테레비니 뭐니 아무것도 없었을 때 아냐? 영화 이외는. 영화가, 영상미디아가 모든 것을 지배할 때니까.
<춘향전> 이후부터는 우리가 안양촬영소 그만둘 때까지 한 250명가량 사원이 있었다. 그러니까 도금봉, 남궁원, 허장강, 김승호, 신성일, 신영균이 전부 전성기였으니까. 전속은 남 못하게 하기 위해서 둔 것이 아니고, 영화를 한달에 세개 백이니까(촬영하니까) 도저히 전속을 안 시킬 수가 없다. 빵구를 내면 안 되는 거니까. 영화 하나에 두달 이상 걸리니까 한달에 동시촬영 다섯개 해야 두개 나온다고. 여기서 충무로 대 신필림이 갈라진다. 충무로에서는 ‘독립푸로’들이 하고 있고, 신필림이 커져가지고 하나의 세력으로서 충무로하고 충돌하는 경향이 생겼다. <춘향전> 때부터 영화가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고 기업화하는 시대였거든.
영화사나 문화사나 모든 것이 희랍처럼, 이집트처럼 시발점이 있고, 죽 가다가 전성기에 굵어지고 그랬다가 또 가늘어지고, 한번 돌아서 다시 굵어지는 것으로 보는데 영화도 마찬가지다. 제일 처음에는 독립푸로로 가다가 마지막엔 역시 ‘메이자’, 왜 그런고 하니 모든 것을 다 찍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추려면 메이자가 돼야 하니까. 메이자로 갔다가 다시 또 독립푸로로 가는 거다. 순수하게 얘기하면 작가정신 가지고 독립푸로 하는 게 좋긴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영화가 안 나오잖아. 자기가 찍고 싶은 건 못 찍잖아. 그러니까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요번에 내가 제시함으로써 재벌들도 영화에 끼어들 것이다 생각했다.
5·16 이후에 영화법이라는 게 생겼다. 영화사라는 데가 하도 부도들 내고 도망다니고 이러니까. 스타디오는 몇평 있어야 되고, 카메라 몇대 있어야 되고, 일년에 몇편 제작해야 되고, 이런 식의 인위적인 제재를 썼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닌데. 내가 안양촬영소 큰 시설 가지고 하는 데도 세개 이상 제작 못하는데 쬐그만 창고 하나 가지고 일년에 세개 이상 하겠나? 영화법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아무 실효를 못 거뒀다고 봐야지.
남들은 내가 큰 영화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촬영소 안 가진 사람 못하는 법을 맨들어가지고 탄압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법이라는 건 군인들의 단순한 발상이다. 나는 처음에는 법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상록수> 때문에 박정희하고 가까워지긴 했지. 박정희가 <상록수>를 보고 울었다고 그래. 그뒤로 상록수운동,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그 바람에 친해졌고 안양촬영소 불하까지 왔다, 그건 그렇게 봐야지.대담 신상옥·이기림정리 이기림/ 영화사 연구자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