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요상한 땅덩어리다. 거의 100년 가까이 제국의 식민지와 반식민지 노릇을 해온 땅이다. 그 와중에 온갖 이념들이 구름 위로 오고갔다. 그런데도 지금 한반도 땅덩어리에는 이념이 없다. 무슨 주의를 내거는 이가 있기는 하나, 그게 현실에서 통용되는 식별표는 아니다. 자기 혼자, 자기 패거리끼리만 주의를 떠들어봤자 의미없다. 그건 그야말로 속된 말로 공적인 담론이니까 공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건데, 그들이 들은 척도 안 하니 소용없는 거다. 아무리 주의를 내걸고 강령을 외치고 해봤자 그걸 곧이곧대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냥 쉽게 그들이 익숙하게 사용해오던 말들로 그 주의에 이름표를 붙여버린다.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왼쪽 편 사람들은 그런 걸 속상해하고 심란해하고 통분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거 하나도 없다. 일찍이 어떤 이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지 의식이 존재를 규정짓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그들이 어떤 말을 쓰는 건 그들의 사회적 존재, 아주 기본적으로는 먹고사는 근원에 놓여 있는 뭔가가 그들의 의식에게 그렇게 말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를 매도하지 말아달라고 떠들 것 없이 우리가 내세우는 바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존재를 정리해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터인데, 사실 이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게 문제는 문제다.
한반도 땅덩어리에서는 유에스가 편가르기의 중요한 열쇠말 중의 하나가 된다. 아니 어쩌면 한반도 땅덩어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존재에게 가장 핵심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게 유에스일지도 모른다. 한반도 땅덩어리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의식에게 새겨지는 이념은 딱 하나다. 유에스주의. 현대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이니 유에스에 대한 태도도 속된 말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일 법도 하건만 이거 참.
한반도 땅덩어리가 유에스와 알게 된 건 꽤나 오래전부터이지만 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건 유에스가 살벌하게 체계적으로 폭력을 생산하기 시작한 40, 50년대부터이다. 유에스는 자체 생산된 폭력을 내부에서 소화하다못해 여기저기 퍼나르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한반도 땅덩어리로 옮겨져 대량 살육의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폭력에 아주 익숙해졌고 그뒤로는 두고두고 병영문화를 세습하게 되었다.
유에스는 애초부터 한반도 땅덩어리와 속된 말로 ‘인터랙티브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말을 걸어오고, 일방적으로 먹을 거 입 안에 넣어주고, 일방적으로 몸 건드렸고, 일방적으로 폭격하고, 일방적으로 머무르고, 일방적으로 간다, 그러고 했다. 온통 일방이지 쌍방은 없었다. 이건 반유에스주의자의 통찰이 아니라 눈만 뜨고 있으면 빤히 보이는 사실이다. 올곧은 지식인 조모씨가 좋아하는 속칭 ‘팩트’다.
한반도 땅덩어리 남쪽에 사는 이들의 사회적 존재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의사소통하는 유에스에 붙어 있다. 그 의존의 핵심은 유에스가 지켜주는 나라들에서 석유를 가져다쓴다는 데에 있다. 그거 없으면 당장 나라경제가 결딴난다. 유에스는 그런 목줄을 쥐기 위해 항상 세계 여기저기에 살인의 추억을 남기면서 자원전쟁을 벌인다. 이런 판국에 어찌 한반도 땅덩어리 남쪽에 사는 이들이 반유에스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회적 존재는 그렇게 꼼짝없이 유에스에 얽매여 있는데도 의식이 그것과 따로 노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 웃어도 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그러나 그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적 존재와 의식을 일치시키려 애쓴다. 대화해보려고 영어를 배운다, 어학연수를 간다, 아이를 낳으러 간다, 시민권을 노린다, 온갖 애를 다 쓴다. 어쩌다 하나 걸려들기는 하나 그건 운이 좋아서일 뿐, 대개는 좌절하고 포기한다. 그들이 보내는 추파는 거부당하고 그들이 보내는 편지는 되돌아온다. 유에스는 꿈쩍도 않는다. 어디다 편지질이야 하면서.하다 안 되면 열받는다. 열받으니 개나 팰까?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