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1등 신문”이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조선일보>의 백미는 역시 광고면. 신문 전체를 통틀어 그 면이 가장 빼어나다. 아마도 그 회사에서 제일 우수한 인재들이 광고부에 배치됐을 게다. 게다가 보도의 정확성! 몇년 동안 눈을 부릅뜨고 <조선일보>를 감시했지만, 신문의 날짜, 일기예보, 그리고 TV 방송안내가 틀리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언론윤리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 적어도 이 면을 지키는 기자들은 아직도 투철한 기자의식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이들이 오늘의 조선을 있게 한 주역이 아닐까?
<조선일보>의 매력이 그뿐이겠는가? 매일 아침마다 그곳에 옥고를 싣는 명사들의 개그가 없다면, 화려하고 풍부한 광고면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조선일보>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도 우연히 훌륭한 글을 접하고, 그만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아침논단’이라는 난에 소설가와 화가를 겸한다는 어느 필자가 쓴 글인데, 주체할 수 없는 소설적 상상력에 화려한 회화적 상상력이 겹쳐 <조선일보>의 다른 필자들이 거의 범접할 수 없는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렘브란트와 피카소와 샤갈이 <조선일보>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먼저 렘브란트가 <조선일보>를 만난다. “그림 속의 남자는 (…) 값비싼 옷과 화려한 모자로 치장한 채 두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어쩐지 불안하고 음습하다. DJ의 햇볕정책에 갑자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는 북한 최고 권력자의 속내가 바로 이런 표정이 아닐까 싶다.” 피카소가 <조선일보>를 만난다. “피카소의 작품들은 어느 면에서 현재 야당의 특성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보수성과 야수성의 혼재, 황야를 주름잡는 마초 같은 이미지, 한번 물면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집요함….”
마지막으로 샤갈이 <조선일보>를 만난다. “샤갈의 작품은 재미있다. 아동스럽고 붕붕 날아다닌다. 노 대통령 역시 유머스럽고 가끔은 꽤나 천진난만하여 피해를 본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과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것도 샤갈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전시회 총평. “요즘 정치판을 빗대어 개구리니 두꺼비 같은 유머가 회자되고 있다는데 이제 정치도 양서류를 넘어 예술의 단계로 진화하기를 기대해본다.” 이렇게 예술이 <조선일보>를 만나면, 해리와 샐리의 만남처럼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로맨틱코미디가 되고 만다.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렘브란트에서 김정일, 피카소에서 최병렬, 샤갈에서 노무현, 여기서 정치판의 개구리 유머로 붕붕 날아다니는 비약. 여기서 나는 원숭이 항문을 급기야 백두산으로 만드는 아동적 상상력을 느낀다. 하여튼 그 동네에서는 대통령을 개구리로 빗대는 유머가 퍽 재미있었나보다. <디지털조선일보>에도 개구리 타령이 등장한다. 고려대학교 현택수 교수님께서 갑자기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나보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입니다. 개골개골… 제발 먹고살게만 해달라고 애원, 통곡하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요즘 고려대학교에서는 교수님들 봉급 제대로 안 주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교수님 개구리까지 나서서 “제발 먹고살게만 해달라고 애원”하며 “개골개골…” “통곡”을 하겠는가. 어쨌든 중년의 교수님이 그 연세가 요구하는 권위의 가식을 혁파하고 동심으로 돌아가 앙증맞은 개구리 율동을 하는 것은, 아마도 이 사회의 경직성을 허물어뜨리려는 파격적인 문화혁명의 일환이리라. 게다가 “제발 먹고살게만 해달라고 애원”하는 저 “개구리 울음소리”. 그 소리는 비록 경제적 지위를 가진 교수의 직에 있으나, 이 땅의 민초의 처절한 삶을 대변하고자 하는 뜨거운 민중연대성의 청각적 표현이 아니겠는가. 현 교수님은 이 시대 지식인의 사표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이라서 그런가? 보수언론에서 유달리 개구리에 관심이 많아졌다. 신문을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의 예상치 못한 거동을 조심하라는 적색경보성 기사가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이 개구리의 혀는 악명이 높아, 이놈이 혀만 놀리면 온 지면을 동원해 온통 난리를 친다. 왜 그럴까? 어쨌든 내가 가진 생물학적 지식에 입각해 추론하건대 개구리의 거동과 그 혀의 움직임에 각별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습성을 가진 동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똥파리밖에 없다. (ps. 아, 그리고 개구리는 똥파리를 잡을 때 파리채를 쓰지 않는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