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체험,삶의 공포

4인용 식탁에 회사원 김창현(49)씨가 앉아 있다. 월요일 새벽, 두쪽의 토스트와 우유 한잔. 새벽의 부엌은 고요하고, 그는 우울하다. 다른 무엇보다, 회사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 한때 잘 나갔던 회사는 IMF를 기점으로 적자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연봉은 제자리지만, 그렇다. 세금이, 웬 세금이 그리 많은 건지, 언제나 억울하다. 이제 곧 정년인데, 쓸 돈은 자꾸만 늘어난다. 생활비 외에도 딸의 교육비에 65만원이 들어간다. 아들의 등록금까지 생각한다면 눈앞이 까마득하다. 아내는, 까르푸를 너무 자주 간다. 몇년 전부터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겐 가계를 챙기는 습관이 생겨났다. 답이 없다. 젊은 시절 뼈를 깎아 진입했던 중산층의 대열에서, 왠지 자꾸만 밀려나는 느낌이다.

회사는 어렵고 아내는 무섭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자식들도 무섭긴 마찬가지지만, 진짜 무서운 건 돈이다. 살면 살수록 그는 돈이 무섭다. 집을 나서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 복권 다섯장이 들어 있다. 7시가 되면 그의 아내 이은희(46)씨가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어김없다. 그녀는, 지겹다. 남편의 봉급으로 네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 월급은, 언제나 부족하다. 또 그녀는, 소박하나마 이 집의 재산증식을 떠맡고 있다. 재산증식이라, 어쩌라고.

가족의 통신비가 쌀값을 넘어섰고, 이래저래 이번 달엔 여섯 차례의 조의금 지출이 있었다. 두번은 삼만원씩, 다른 네번은 오만원씩. 아무리 아껴도 가계는 늘 제자리다. 웬걸, 빚을 얻어 딸의 학원비를 마련한 게 벌써 석달째다. 돈은, 늘 스트레스다. 식사를 마치면 그녀는 503호 여자와 함께 까르푸에 갈 것이다. 요즘엔 TV드라마 <앞집 여자>가 그녀들의 주된 화젯거리다. 때로 그렇게 살아봤으면, 그녀는 생각한다. 사고 싶은 외제는 너무 비싸고, 남편은 늘 그녀의 씀씀이에 간섭하고, 딸의 성적은 점점 떨어진다.

삶은, 늘 스트레스다. 그녀의 낙은 경품행사다. 어제는 경품으로 상품권을 받았다. 기분이 째지는 줄 알았다. 그녀는, 상품권이 너무너무 좋다. 그래, 좋아지겠지. 상품권을 떠올린 그녀의 표정이 밝아진다. 잠시 뒤 이은희는 딸 김시정(17)과 함께 아침을 든다. 인문계 여고에 재학 중인 김시정이 가장 하고 싶은 건 성형수술이다. 코를 좀 높이고, 턱을 다듬었으면, 한다. 그랬음 좋겠다. 살을 빼는 건, 물론 기본이다.

그녀는 밥을 남긴다. 벌써 한달째다. 다이어트다. 최근 들어 왜 사람들이 명품 같은 걸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간혹 원조교제에 나선 친구들의 얘기도, 듣는다. 듣고는 한다. 학교생활이나 학원생활엔 이미 이력이 났다. 돈도 안 주면서, 번지르르한 변태 같은 얼굴로, 아버지는 늘 공부만 하라고 한다. 짜증이다. 확 해버릴라, 그녀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공부 얘기 좀 그만 해. 이은희와 김시정은 함께 집을 나선다. 둘은 쇼핑몰과 학교로 각자 흩어진다. 그리고 9시쯤 이 집의 아들인 김시현(22)이 일어난다. 화장실을 다녀온 김시현이, 끝으로 그 4인용 식탁에 걸터앉는다.

식탁에는 이은희가 차려놓은 아침상이 식탁보로 덮여 있다. 김시현은 영화에 관심이 많다. 또 최근엔 애인이 생겼다.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늘, 돈이 많았으면 한다. 자신의 삶이 영화 같기를, 그는 늘 꿈꾸는 편이다. 취업을 생각하면, 답이 없다. 머리 아프다. 짧고 굵게 살고자, 그는 노력한다. 중고라도, 자신의 승용차를 갖는 게 현재의 꿈이다. 이래저래 갈 곳이 많다. 얼마 전 그는 로또 동호회의 회원이 되었다. 꿈은 늘 대박인데, 운은 늘 소박하기만 하다. 또 누군가가 42억원을 챙겼다. 젠장. 김시현은, 늘 그랬듯 텅 빈 4인용 식탁에 앉아 영화잡지를 뒤적이며 밥을 먹기 시작한다.

뒤적뒤적, 밥과 잡지의 책장이 비슷한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문득 여름납량물을 다룬 한 페이지에서, 이란 제목의 영화가 눈에 띈다. 공포물보다는 심리를 다룬 미스터리물로 봐달라.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김시현은 읽는다. 사진은 섬뜩하고, 밥맛은 떨어진다. 하지만 글쎄, 공포물과 미스터리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김시현은 밥알을 씹으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알 수 없다. 당신은 아는가? 아니면 당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혹은 동생은? 그나저나 당신의 집에도 4인용 식탁이 있는가? 박민규/ 무규칙이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