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선생님, 김규항입니다.” “예. 조금 아까도 김 선생이 전화하셨습니까?” “예. 30분쯤 전에 제가 했습니다.” “누워서 주사를 맞고 있어서 일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이 편찮으십니까?” “좀 그렇습니다.” “잡지가 이제 거의 짜여져서 한번 찾아뵈려고 연락드렸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드릴 이야기도 있고 하니 한번 와주시겠습니까?” “다음주에 언제가 편하십니까?” “화요일은 서울 병원에 가고 다른 날은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찾아뵙는 걸로 하고 시간은 그날 아침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나는 월요일 아침에 전화 드린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전날 폭우를 무릅쓰고 산에 올랐다가 전화기에 물이 들어가버렸다. 전화번호야 달리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날은 종일 이래저래 경황이 없었다. 전화 드려야 하는데, 드려야 하는데 속으로만 생각하다 하루가 다 지났다. 새벽녘에 사무실에서 깜박 잠이 들 즈음에야 나는 선생이 이미 월요일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찾아뵈었어야 했다는 소용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거의 짜여진 잡지’란 내가 한해 전부터 준비해온 ‘어린이 교양 월간지’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대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내 글을 제 얼마간의 사회의식을 배설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두 가지 결심을 했었다. 하나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 만큼 급진적인 글을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남은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만드는 것.
첫 번째 결심은 얼기설기 진행 중이고 두 번째 결심은 ‘어린이 교양 월간지’로 이어졌다. ‘만화라는 그릇’을 사용한다는 내 생각을 선생은 손뼉을 치며 반겼다. 선생은 한글 교열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은 당부했다. “아이들에게 어떤 생각을 심어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게 잘 열매맺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선생의 당부는 내내 기획 작업의 기조가 되었다.
문상은 물론 부조, 화환도 받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문상객들은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담소나 하고 있었다. 어느 거들먹거리는 인사들이 보냈을 몇개의 화환은 돌려 세워져 있다. 엉덩이를 옮기며 여기 앉아 좀 드시라 부르는 어떤 이의 호의를 나는 목례로 거절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상가라면 굳이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동행한 후배와 감나무에 파란 감이 주렁주렁 달린 선생의 작업실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보고 바로 길을 나섰다.
그날 밤 선생의 사진들을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나는 두해 동안 반년 간격으로 선생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 선생은 지난해 초순으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쇠잔해지고 있다. 그 무렵 선생은 당신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정작 당신의 생각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낙심했다. 선생보다 육체적으로 젊은 누구도 선생보다 정신적으로 젊지 않았다. 그들은 선생의 낙심을 노인의 강퍅함으로 해석하는 듯했다. 선생은 절대 고독에 침잠해갔다. 제 신념에 제 삶을 완전하게 일치시키는 사람들이 겪곤 하는 숙명적인 절대고독에.
노트북 화면에 뜬 선생의 커다란 눈을 보며 나는 말했다. “선생님을 온전히 이어받을 사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대신 선생님은 여러 사람들의 정신 속에 나누어 살아 계십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김규항/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