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1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자’는 다소 엉뚱한 발상으로 시작된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이 어느덧 만 6년을 맞았다. 8월28일 시작, 31일 막을 내린 이번 제17회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은 남다른 의미를 가졌다. 1997년 6월 홍익대 앞의 한 클럽에서 시작해, ‘D.I.Y 정신’과 유희성을 강조하며 독보적인 행사로 자리잡은 이 영화제가 관객에게 고별을 선언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가 중단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재정난과 운영진의 피로지만, 그 이면에는 미로처럼 복잡한 사연이 있다. 특히 십만원영화제 조직위원회가 중심이 돼 지난해 11월부터 위탁운영해오던 활력연구소가 또다시 파행을 겪고 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끼쳤다. 1회 행사부터 마지막 행사까지 꾸준하게 ‘십만원영화제’를 이끌어왔고 ‘매니저’로서 활력연구소를 주도해온 최소원씨를 만나 행사 중단의 배경과 6년 동안의 행로에 관해 들어봤다.
우선, 십만원영화제를 그만 열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가장 직접적 계기는 십만원영화제를 장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기반이라 믿었던 활력연구소 운영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일관되지 않고 무성의한 행정에 맞서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사실 영화제 지속 여부를 놓고 고민을 한 지는 오래됐다. 첫째는 재정난이다. 딱히 후원이나 지원을 해주는 곳도 없어 계속 힘들었지만, 2001년쯤부터는 사무실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두 번째는 재정난보다 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행사가, 처음 열었을 때의 초심과 달리 나아갔다는 점이다. 초반에는 일반인들이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어수룩한 기술적 완성도에 담는 작품이 많았는데, 갈수록 기술적 완성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수상경력을 얻으려는 작품이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영화제를 운영하는 우리 자신의 재미가 없어졌다.
어차피 기술적 진보는 존재하고, 그에 따라 완성도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우리가 행사를 처음 열던 초기에는 8mm 가정용 캠코더를 이용한 작품이 대다수였다. 그러다 6mm 디지털 장비가 보편화되고, PC를 통한 디지털 편집이 가능해졌다. 이런 변화를 보던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상상력의 경계를 넓혀주리라 생각했다.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영화는 상투적이 돼갔고, 디지털의 상상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적은 예산으로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은 좋아졌는데, 재미가 없어졌다니 역설적이다. 개인이 작은 장비로도 웬만한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그랬는지, 이야기의 구조와 내용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데 급급했고,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여주려 애쓰는 작품이 많아졌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영화의 특수효과를 보여주거나 기발한 장면전환을 실험한다든가, 무조건 카메라를 흔들어댄다든가. 자연히 경제적으로 답답하고 영화를 예산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답답하고 영화제를 너무 진지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답답했다.
십만원영화제는 어떻게 열게 됐나. 90년대 중반, 대학교 졸업은 안 하고 홍익대 주변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놀고 있었다. 영상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시네마테크를 다니며 단편영화 제작을 배우기도 했다. 당시 독립영화 축제라곤 삼성나이세스영화제밖에 없었는데, 너무 답답했다. 너무 진지한 분위기고 필름이 아니면 출품도 안 되더라. 또 시네마테크에서 영화제작을 배우는 사람들도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엄청나게 아르바이트 해서 몇백만원씩 모으더라. 그 분위기가 이해가 안 됐다. 난 당시 ‘언더그라운드’라는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외국인 친구 등과 파티도 기획하고 함께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디오로 파티를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친구들로부터 1만원씩 받아서 몇명이 비디오로 영화를 찍었고, 그것을 파티로 열었다. 그게 첫 십만원영화제였다.
나름의 어떤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 같다. 십만원영화제는 홍익대 앞 클럽문화에서 시작된 행사답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열리는 축제를 지향했다. 퀄리티를 따지지 않는. 우리는 ‘생활창작자’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표출하는 일반인들을 가리킨다. 그런 창작자들의 다양한 시도들이 생활 속의 영상, 재미, 예술성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땐 나 또한 라는 작품을 내기도 했다.
처음엔 제작비를 정말 10만원 미만으로 제한했다고 하던데. 1회 행사 때만 그랬다. 비디오카메라 대여비, 테이프 값, 도움을 주는 스탭과 배우들 대접할 밥값 등으로 10만원이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10만원으로 제한하는 게 무의미했다. 당시엔 비디오를 대상으로 하는 영화제가 없었기 때문에 제작비 제한은 불합리했다. 나중엔 우리가 특정인에게 주제와 10만원만 달랑 주고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해 엮은 기획전이 열리기 시작했다. 영화가 아닌 무용, 미술, 음악 분야의 기획전을 만들기도 했다.
어떻게 계속 영화제를 열게 됐나. 그렇게 행사를 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나는 계속 기획자로 남게 되더라. (웃음) 무슨 사명감이나 희생정신으로 한 게 아니라 영상작업이든 기획이든 다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왔다. 나도 나름대로 많이 배우고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생계유지는. 영화제로는 턱도 없었다. 학원 강사, 번역 등 이것저것을 해야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가 있다면. 2000년인가 대학로 하이텔 온&오프 소극장에서 행사를 열 때, 모두가 등이 팬 옷을 입고 길거리에 나와 “한번 오세요”라며 ‘호객행위’를 했다. (웃음) 대학로 한복판이라서 그런지 관객도 많이 모였다.
영화제를 통해 인상을 남긴 작품도 있었을 것 같다. 3, 4, 5회 행사에서 히트작들이 나왔다. <와트맨>이라고,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인데 아이디어가 뛰어났다. <검은새>라는 작품은 거친 실험작품이었지만 기술적 시도가 뛰어났다. 편집기조차 없어서 방에 불을 다 꺼놓고 비디오를 틀고 TV화면을 찍어서 편집을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실시간으로 음악을 집어넣었고. 이런 작품들이 부각돼 지방행사에도 불려가고 학교행사에도 나가고 했다.
6년간의 성과를 정리한다면. 미디어운동이라는 차원에선 모르겠지만, 비디오영화제라는 형식은 많이 보급된 것 같다. 그리고 80년대엔 사회운동으로 영상을 사고하는 게 주류였다면, 90년대 중반 들어서는 십만원영화제를 기점으로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독립영화제를 가면, 어떤 영화의 경우 “십만원스럽다”고 부르게 되기도 했다. (웃음)
‘십만원스럽다’는 것은 기술적 후진성을 가리키는 것인가. 레스페스트 같은 행사는 디지털 매체를 이용해 기술적 실험을 많이 하잖나. 페스티벌마다 정체성이 있는 건데, 십만원이란 숫자가 상징하듯 기술적으로는 못해도 좋다,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사실, 행사를 열면서 영상에 관해 기술적으로 완숙된 사람들과 처음 시작하지만 재기발랄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인마 잭>이란 작품을 들고 나왔던 박명랑 감독의 또 다른 시나리오를 당시 심사위원이던 김지운 감독이 인터넷영화 <커밍아웃>으로 만든 게 하나의 사례였다.
활력연구소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서울시에서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운영 의뢰가 들어왔다. 한독협에선 독립영화 전용관을 생각했는데, 이곳 천장이 낮아서 필름을 상영하기엔 적합하지 않았고, 비디오 중심의 영상센터 개념이 맞겠다고 판단해 우리에게 제의했다. 우리 또한 사무실도 없어지게 됐고, 하자센터 등에서 문화기획 강좌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가 맞았다. 또 아트선재센터나 쌈지에 저가로 편집 등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자고 제안하던 터라 잘됐다 싶었다. 십만원영화제를 1회적 행사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가져가기에도 이곳이 좋다고 판단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2001년 6월부터 준비에 들어갔는데, 운영비가 가장 큰 문제였다. 시에서는 시설만 지어놓고 운영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운영비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지난해 11월 힘들게 오픈했지만, 8개월이 넘도록 시로부터 애초 약속했던 5천만원 중 1천만원만 받았고 영진위에서 2천만원만 받은 상황이다. 1년에 전기료만 1500만원이 나오는데 무슨 수로 운영을 하나.
활력연구소 운영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도 운영비 때문인가. 직접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동안 지난한 싸움을 하면서 서울시와 이성적으로 대화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역시 행정적 문제에서 미숙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근원적으로는 서울시의 원시적인 행정이 문제였다. 우리가 운영을 포기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운영비를 달라는 우리의 요구에 대해 미진하던 서울시가 새롭게 공모를 통해 위탁운영 주체를 뽑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이제는 정말 지쳤고, 피곤하다.
활력연구소 위탁운영을 그만둔다고 십만원영화제까지 없앨 필요는 없지 않았나. 원칙적으로 활력연구소 운영과 영화제는 다른 일이긴 하다. 하지만 십만원영화제를 하면서 활력연구소 같은 하드웨어가 있어야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실현될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너무 산업적으로만 보고 있는데, 우리는 일반인들이 영상문화를 향유하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것을 위한 조건이 이런 하드웨어고 그것의 발현이 영화제인 셈이다. 둘은 단단히 연결돼 있는 셈이다.
아쉬운 점은 없나. 운영한 지 현재 9개월 정도 돼가는데 예상보다 많은 이용자가 왔다. 회원 수가 7월 말까지 1만명을 넘어섰을 정도다. 영상전 같은 행사도 본궤도에 올랐다. 7월에 연 ‘국내영화제 완전정복’ 행사엔 1600명 정도 참여했다. <비타니 유리 전>이라든가 <밀키 엘리펀트 전> 같은 마니아 대상 프로그램도 반응이 좋았다. 또 65석 규모의 활력극장에도 많은 문의가 오고 있다. 문화학교 서울도 사무실이 없어지면서 정기상영회를 열고 싶다고 하고, 퀴어아카이브 같은 데서도 연락이 온다. 활력연구소가 자리한 충무로 지하철역 부근에 사진현상소와 인쇄소가 많아 사진, 미술쪽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는 점도 내용을 풍부하게 가져가는 데 도움이 된다. 또 50대 이상의 장년층이 프리미어 편집을 배우기도 한다. 일반인들이 영상에 관해 첫발을 내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완전히 자리잡으려 하는 참이라 더 아쉽기도 하다.
마지막 영화제는 어떻게 치르나. 마지막 행사답게 슬로건을 ‘중간은 슬퍼도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좋아요’로 잡았다. 기획전의 주제도 ‘어쩌면 해피엔딩’이라고 설정했고 김지운, 김홍준, 곡사, 이난, 박효진, 채기 감독 등 상업영화, 독립영화, ‘십만원영화’ 진영의 감독을 고루 선정했다. 또 <두뇌특공대 구비레인저>를 만든 일본의 사카도쿠 고와쿠 감독이 방문해 영화제 현장에서 2편을 찍고 간다고 한다. ‘바보영화’라 불리는 골때리는 영화인데, 우리도 바보 되는 건 아닌지…. (웃음) 상황이 너무 갑작스레 전개돼 십만원영화제 작별행사는 못 연다.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수영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요즘 독립영화계에선 운동과 영어공부가 열풍이다. (웃음) 나 역시 공기가 안 좋은 지하철 역사 안에서 일하다 건강이 나빠진 것 같다. 그리곤 그동안 못했던 것들, 그러니까 열심히 보고 열심히 향유하려 한다. 그렇게 개인적인 나로 돌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