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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복 감독과 <영매> [2]

“저승길이 길 같으면 오고가고 내 못 올까”

다큐멘터리 <영매>, 저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영상’ 씻김굿

김장호/ 비교종교사 및 도상학 연구가·다빈치출판 대표 alhaji@hanmil.net

얼마 전 시베리아에 가서, 바이칼 호수에 가서 책으로만 접하던 그곳의 샤머니즘을 직접 보았다. 새삼스레 항간에서 설왕설래하는 ‘바이칼 한민족 기원설’이라든지 ‘시베리아 우리 문화 시원론’ 같은 이야기를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그곳에서 보고 느낀 샤머니즘 문화는 내 영혼을 진동시키고도 남았다. 그때의 영적 충격이란 “난 세상의 경계선 위로 몸이 들어올려졌고, 내 발은 하늘 저편을 딛고 다녔다”는 어느 샤먼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샤머니즘을 미신으로 단정한다. 도대체 미신이란 무엇인가, 기성 종교와 현대과학에서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초월적 현상을 좇는 것이라 말한다. 유일신이란 영적 독재자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현대 과학문명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겠다는 속셈이 ‘미신의 정치학’인 것이다. 이건 빌어먹을 종교적 파시즘이다.

그런데 기성종교와 현대과학은 우리에게 한 가지 금기를 부여한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말하거나 따지는 것이다. 당신은 술자리에서 소주잔을 들고 최근의 연예계 소식에서 작금의 시국현황까지 거론하겠지만 여태껏 죽음에 대해 벗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가. 그것도 남 죽은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죽어서 어떻게 될지, 무엇이 될지에 관해서 말이다. 물론 죽어서 천사가 되리란 굳은 신념 아래 어떤 모양의 날개가 자신에게 어울릴지 궁금해하거나, 영혼 보존의 법칙 같은 건 헛소리고 죽으면 말짱 황이라 믿는 이들은 제외될 것이다.

샤머니즘은 죽음의 종교이다. 태곳적 우리 조상들은 이 세상이란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이란 가없이 넓어 어느 구석인가에 죽은 이들을 위한 자리도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병이나 사고로 죽더라도 그걸로 끝나지 않고 혼백이란 게 있어서 육신을 떠나도 우리는 계속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보통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혼백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샤먼의 존재도 믿었다. 샤머니즘은 먼저 죽은 자를 믿고, 미신을 믿는 것이다.

샤먼은 철학자라는 이들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의 죽음에 관해서 깊게 사색했다. 그들은 인간이 걷게 되는 죽음의 길에 대해 생각했고, 그 길이 닿는 저승세계를 그려보았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가진 영적인 능력 때문이었고, 이 능력을 수호신령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이 영력으로 죽은 자들은 물론 이름을 알 수 없는 악령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샤먼은, 개인 혼령의 구제라는 명목 아래 민원(民怨)에만 매달리는 요사이 무당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그들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세계의 근본을 탐구했고, 인류의 운명을 신에게 물었다.

위대한 만큼 샤먼이 되기 위한 과정도 남달리 고통스러웠는데 샤먼이 되기 위해서는 유사임종, 즉 큰 병을 앓아야 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무병’인데, 이에 걸린 이는 샤먼이 되지 않으면 더욱더 큰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의 경우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절차이다. <영매>에 등장하는 강신무는 “내 몸뚱이 갖고 내 마음대로 못한다. 남들은 약 먹으면 낫지만…” 하고 자신이 겪은 무병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친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현대 한국의 무속까지 공통적으로 발현하는 무병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갈린다. 한 개인의 영적인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현상이라는 것과 개인의 바깥에서 신령들이 아니면 저승에서 내보내는 질병이라는 것. 샤먼은 신내림을 통하여 새로운 몸을 얻어 이승과 저승을,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오간다. 그런데 저승과 죽은 자를 만나는 일은 죽지 않고서는 불가능한데, 산 자의 몸으로 이승에서 가능함은 언급한 대로 유사임종을 겪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많은 샤먼들은 수년간 중병을 앓았으며, 사회적으로는 따돌림을 받고, 심리적으로는 혼란을 겪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고난기를 통해 그들의 육신과 영혼은 전혀 새로운 지각체계 속으로 영입된다. 이같은 생리학적 변형과정이 절정을 이루는 때는 바로 위에서 말한 육신의 해체체험(육신이 갈가리 찢기거나 잘리고 부서지는 절단의 체험)으로써 이때 내면적 변화의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절단체험은 초논리적, 초주관적 세계를 포괄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직접적인 저승여행, 저승의 동물이나 신령과의 교제, 또는 영력을 지닌 사물을 얻게 되는 것들도 의식의 무한한 영역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형태들이다. 샤먼의 체험은 우리에게 흔히 신화적이고 낯선 느낌을 주지만 죽음과 부활의 체험은 시대를 막론하고 출현했으며, 이것이 모든 종교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엄청난 육신의 고통 뒤에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예수뿐만 아니라 저승여행을 떠난 무하마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탄탈로스가 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신전에 제물로 바쳤으나 신들이 그 아들을 삶는 도중에 되살아났다던가 하는, 절단체험을 통해 젊음을 되찾고 되살아나는 경우는 유럽 신비주의자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홀거 칼바이트, <세계의 무당>)

104분짜리 다큐멘터리 <영매>를 보며 나는 수없이 몸을 떨었고, 한없이 울었다. 신령이 즐겨 찾는 영매인 무당은 마음에 한이 맺힌 이들로, 비극적 숙명을 지녔다고 한다. 그들의 한과 숙명이 슬펐고, 그들을 매개로 하여 오고가는 저승의 혼짓과 이승의 혼절이 너무 가슴 아팠다.

<영매>에서는 ‘당골레’로 불리는 세습무와 ‘점쟁이’라 하는 강신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진도 세습무 자매의 사별과정이 처음과 끝을 이룬 구조는 너무 절묘했다. 임종을 의도했을 리는 없을 터이고 길었던 기록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우연이라고 여기기에는 묘한 느낌이다. 그리고 강신무에 점점 밀려 자취를 감추는 세습무의 모습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한 가닥을 발견한다. 여러 자식이 있건만 아무에게도 굿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에서, 체메후에비 샤먼 차카라가 여섯 자녀에게 일렀다는 말이 생각난다. “난 너희들에게 영력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난 너희가 별 고통을 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영적인 능력은 물려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동물처럼 조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영매>에도 나오지만 강신무이자 세습무여서 어머니가 모시던 신령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도 있지만 샤머니즘의 유전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게다가 사람의 혼을 다루는 무당은 물건을 다루는 장인도 아니지 않은가. 감독의 세습무에 대한 집착과 애정은, 굿이라는 게 반드시 넋을 달래는 해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학과 놀이라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무당의 왜 왔느냐는 질문에 신령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꽃이 지고 단풍이 지니 한번 놀자고 왔다고. 그렇다. 세습무가 한판 벌이는 굿은 이승에 미련이 있는 혼령뿐만이 아니라 이승에서 온갖 시름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 박기복 감독과 <영매> [1]

▶ 박기복 감독과 <영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