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젠틀맨리그> 그들의 과거가 알고싶다 [1]
김현정 2003-08-14

<젠틀맨리그> 7인의 영웅과 악당, 원작과 영화 사이

<젠틀맨리그>는 이중의 각색을 거친 블록버스터다. 앨런 무어의 만화를 할리우드에 맞도록 고쳤지만, 무어의 원작 자체가 19세기 영국 문학의 걸작들을 참고하고 있는 탓이다. 일곱명에 달하는 ‘젠틀맨리그’ 멤버들과 한명의 악당이 가지는 함의도 풍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젠틀맨리그>는 블록버스터다. 미청년 도리안 그레이가 어떻게 수십발의 총알을 맞고도 무사한지,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 오지에 은둔한 노인 앨런 쿼터메인을 리그의 지도자로 택했는지, 미나 하커가 치욕의 상처인 것처럼 보여주는 목덜미의 작은 구멍 두개는 누가 뚫어놓은 것인지, 지킬 박사인 동시에 하이드씨인 남자가 어떤 연유로 두개의 신체와 정신을 가지게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다. 영화를 탓할 수도 있겠지만, 문을 열어주기 전에 두드리는 것도 우리 앞에 놓인 길 중 하나. 한 세기 전의 공기를 체험할 수 있는 <젠틀맨리그>의 참고도서들을 찾아 일일이 그 책장을 들춰보았다. -편집자 주

관찰자에서 완벽한 지도자로 앨런 쿼터메인

원작 | 솔로몬 왕의 보물 | H. 라이더 해거드 지음 | 최홍 옮김 | 영언 펴냄

사냥꾼 앨런 쿼터메인은 이십년 전, 사막 넘어 산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는 솔로몬 왕의 보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나선 사람은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돈 많은 귀족 헨리 커티스는 전설을 잊고 지내던 쿼터메인을 찾아와, 보물이 있다는 산맥으로 떠났다가 실종된 동생을 구하자고 제안한다. 쿼터메인은 다이아몬드에 유혹을 느껴 해군 장교 존 굿과 비밀이 있어 보이는 원주민 움보파와 함께 죽음의 사막 경계로 다가간다.

<솔로몬 왕의 보물>은 열네편의 시리즈로 이어진 앨런 쿼터메인의 모험담 첫 번째 이야기다. 나이든 사냥꾼인 그는 수백 마리는 될 법한 사자와 코끼리를 잡았고, 원주민 군대와도 싸웠지만, 약점이 많은 인물이다. 스스로 소심하고 겁많은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우느니 비굴하다고 놀림받는 편을 택하겠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런 쿼터메인은 이 소설에서 남자답고 당당한 동료들을 칭송하는 충실한 관찰자로 남는다. 그의 경험과 지혜가 도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쿼터메인이 무대 전면에 나서는 일이 드물다. 위기다 싶으면 도망가고, 잔머리를 굴리는 인디아나 존스는 쿼터메인을 참고한 캐릭터라고 한다. H. 라이더 해거드는 절대미를 지닌 불사의 여왕 아샤 시리즈로도 인기를 얻었고, 쿼터메인과 아샤가 동시에 등장하는 소설을 쓰기까지 했다. 19세기 말 식민지에서 살아보았던 라이더 해거드의 경험은 부족한 문학적 자질을 생생한 묘사로 대신해준다. 그러나 “태양은 어둠과 어울릴 수 없고, 백인은 흑인과 어울릴 수 없다”는 전제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거슬릴 수도 있다.

영화 | 완벽한 지도자다. 앨런 쿼터메인은 수백 야드 밖에서 움직이는 표적을 쏘아맞추고, 세계대전을 눈앞에 두고서도 여유롭다.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다가 아프리카에도 위협이 닥치는 것을 보고 총을 잡는 사나이. 마지막 장면에선 깜짝쇼를 볼 수 있다.

연약한 여인에서 전천후 뱀파이어로 미나 하커

원작 | 드라큘라 | 브람 스토커 지음 |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펴냄

<드라큘라>는 수없이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원작이 살아남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드라큘라 백작은 그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매혹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훈족 아틸라 왕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드라큘라는 강한 완력과 어둠의 생물을 다스리는 능력, 불사의 신체를 가진 흡혈귀다. 많은 작가와 감독들은 브람 스토커가 세운 기본 뼈대에 자신만의 취향과 해석을 덧붙여왔다. 그러나 20세기를 3년 앞둔 해에 출판된 <드라큘라>는 세기말의 혼돈과 다가올 백년을 바라보는 불안이 담겨 있고, 자연과학을 향한 맹신과 떨치지 못한 미신의 흔적이 기묘한 조합을 이루는 소설이다. 브람 스토커는 어쩔 수 없는 19세기 말의 산물이지만, 후대에까지 피비린내를 남길 걸출한 괴물을 만들어냈다.

브람 스토커는 <드라큘라>를 믿을 만한 괴담으로 만들기 위해 기록문학의 형식을 택했다. 트랜실베니아에서 칩거해온 드라큘라 백작을 변호사 자격으로 찾아간 조나단 하커, 영국에서 그를 기다리는 정숙한 약혼녀 미나, 자신의 환자를 관찰하면서 뭔가 섬뜩한 괴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정신과 의사 수어드 등은 일기나 편지를 통해 드라큘라의 존재와 그에 맞선 싸움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미나의 친구 루시가 흡혈귀에게 살해당한 뒤, 하커 부부와 루시의 구혼자들, 흡혈귀를 연구하는 과학자 반 헬싱 박사는 드라큘라를 처단하고자 한다. 그러나 남자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드라큘라는 미나마저 먹잇감으로 삼는다. 어둠에 잠겨 들어가는 미나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드라큘라의 생명을 뺐는 것뿐이다.

영화 | 햇빛 속에서도 나다닐 수 있는 전천후 뱀파이어가 됐다. 소설에선 남자들의 싸움을 타이핑하고 정리하는 비서 역할에 머무르지만, ‘젠틀맨리그’가 필요로 하는 건 과학자로서 그녀의 두뇌. 한때 도리안 그레이와 연인이었다.

노틸러스호 선장이란 것만 같네 네모 선장

원작 | 해저 2만리 | 쥘 베른 지음 | 이인철 옮김 | 문학과 지성사 펴냄

쥘 베른은 이십 세기를 미리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예측했던 작가다. 상상력과 통찰력을 모두 갖춘, 흔치 않은 작가였지만, 성인이 돼서 그를 다시 만난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600쪽 넘는 분량으로 번역된 <해저 2만리>는 쥘 베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이다.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을 바다생물들을 묘사하는 필치나 빛이 닿지 않는 심해를 꿈꾸는 문장은 쥘 베른의 다른 소설들까지 다시 한 번 찾아 보고 싶도록 만드는 요소. 그러나 무엇보다 새로운 것은 네모 선장과 그 선원들에게서 감지할 수 있는 증오와 아픔이다. 아동용 다이제스트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네모 선장의 알 수 없는 고통이, 소설에선 육중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가온다.

19세기 중반, 선박들이 정체 모를 괴물과 충돌해 침몰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한다. 소설의 화자인 파리 박물관 교수 아로낙스와 그의 하인 콩세유, 작살잡이 네드는 원정을 위해 올라탄 에이브러햄 링컨 호가 마찬가지 이유로 난파한 뒤 표류하다가 네모 함장에 의해 구조된다. 바다 위에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바다 아래서 떠오른 배 노틸러스. 괴물은 거대한 오징어나 고래가 아니라 복수심에 불타 물밑을 헤엄쳐온 잠수함 노틸러스호였던 것이다. 비밀을 목격했기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게 된 세 사람은 반은 인질로, 반은 손님으로 노틸러스호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네모 선장이 선원들을 떠나보내는 깊은 바다 산호 무덤이나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듯한 네모 선장의 흐느낌, 오래 전 수장된 난파선의 잔해가 이전에 알던 <해저 2만리>와는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영화 | 인도인이 됐다. 칼을 잘 쓴다. 노틸러스호의 선장이라는 것말고는 원작과 닮은 점이 거의 없다.

미소년에서 강인한 남자로 도리안 그레이

원작 |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지음 | 이원용 옮김 | 일신서적 펴냄

오스카 와일드는 그가 쓴 희곡이나 소설, 동화보단 그가 일으킨 스캔들로 더 유명한 작가다. 책표지에 박힌, 뭔가 소망하는 듯한 눈을 가진 와일드의 사진은 굳이 해설을 읽지 않더라도 ‘탐미주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평자들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 등장하는 분방한 조언자 헨리 경을 와일드 자신으로 지목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아름답게 남기보단 아름다운 대상을 사랑하는 일을 더 욕망할 것처럼 보인다. 더이상 추할 수 없는 심성을 가진 도리안 그레이지만, 와일드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언어로 그려나갈 때만은, 추악한 영혼 덕분에 더욱 선명해진 미적 충격을 던진다. “상아와 장미꽃잎으로 된 것 같은 젊은 아도니스”라는, 과잉의 표현은 아무데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유하고 젊은 귀족청년 도리안 그레이는 화가 배질 홀워드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늙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한탄한다. 언제까지나 젊음을 잃지 않는 쪽이 자신이고 늙어가는 쪽이 그림이라면, 이라고. 그리고 그 기원은 현실로 나타난다. 초상화를 집에 걸어둔 도리안 그레이는 자신의 매정한 말 때문에 사랑하던 여배우가 자살한 날, 초상화가 조금 흉하게 변했다고 느낀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리안은 악해지고, 초상화는 그 죄과를 대신 짊어져 추해진다. 중년에 이른 도리안은 더이상 초상화를 감당할 수 없어 나이프로 그림을 찢으려 한다.

영화 | 자신의 초상화를 보아야만 죽음을 맞는 불사신. 화사한 미소와 어린아이 같은 응석으로 귀부인들을 녹이는 소설과 달리 뱀파이어 미나 하커와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검술에 능한, 강인한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바람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젠틀맨리그> 그들의 과거가 알고싶다 [1]

▶<젠틀맨리그> 그들의 과거가 알고싶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