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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4]
2003-08-14

영화 속 자살, 영화밖 자살

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4]

몸 날리는 사람들, 한국 근대성의 그늘

남재일/ 고려대 강사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간다.”<설국>(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유서는 간결했다. 그는 일흔넷 되던 해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와 함께 가스불을 피워놓고 잠을 청함으로써 삶을 마감했다. 이 죽음에 ‘자살’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삶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대가로 감내해야 했던 허무의 늪을 청명한 언어의 징검다리로 건너가, 마침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 그가 죽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볼 것 다 보고, 할말 다 해버려 이제는 바람 빠질 일만 남은 가죽부대를, 그는 서둘러 급행열차에 태워 떠나보냈을 뿐이다. 그러니 이 논리적 귀결에 ‘살’(殺)이란 말을 붙이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소설가이자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죽음도 이와 유사했다. 몇년 전 국내에 번역된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에 실린 저자 약력에는 “자유의지로 삶을 마감했다”란 표현을 쓰고 있다. 헤밍웨이의 경우는 좀더 데시벨이 높은 죽음의 방식을 택했다. 사냥용 엽총으로 평생 욕망과 고뇌로 티격태격하던 육체의 본부를 날려버렸다. 소란스럽긴 야스나리의 제자였던 미시마 유키오도 마찬가지여서, 스승이 죽기 직전에 사무라이처럼 할복했다. 그는 칼로 베어버리고 싶지만 일일이 다 베어낼 수 없는 세상의 군살 대신, 그 군살의 축적에 일조한, 욕망으로 가득 찼던 자신의 근육질 배를 갈랐다. 여기에 비하면 흐르는 강물에 아카시아 꽃잎처럼 몸을 맡겨버린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은 얼마나 조용한가. 피안으로 훌쩍 건너가고 싶은 열망은 등 뒤에 요란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다. 그녀는 ‘디아더스’로 결코 귀환하지 않을 조용한 확신 속에서 흘러가버렸다.

산 자에게 희망의 똥침을?

유명 작가들의 자살은 종종 작품 세계와 접합돼서 하나의 문학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무명의 자살이 사회에서 처리되는 방식은 훨씬 기계적이다. 대개 뉴스에서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접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은 ‘왜?’이고, 그 다음 궁금한 점은 ‘어떻게’이다. 뉴스는 여기에 화답해서 ‘자살동기’와 ‘현장의 상태’를 필수적인 팩트로 전한다. 그런데, ‘어떻게’에 해당하는 자살 방법은 현장에 물증의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단순 전달이 가능하다. 그러나, 자살 동기는 한 개인의 생애 전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명쾌한 규정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자살을 몇개의 항목으로 범주화해서 설명하는 오랜 습관 속에서 살고 있다. ‘생활고 비관’, ‘신병비관’, ‘가정불화’, ‘실연’, ‘비사교적 성격,’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 등등이 흔히 보는 자살 동기의 범주들이다. 군대는 ‘가정불화’, ‘실연’, ‘내성적 성격’이란 불과 세개의 범주만으로 모든 자살을 설명하는 기막힌 효율을 과시한다. 한 개인이 삶을 마감한 이유를 이렇게 단순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개인이 삶을 포기한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자살 동기란 범주는 사실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등을 돌리기 위한 방패이다.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에 대한 지독한 두 가지 궁금증- “내 삶이 행여 저 죽음에 개입했을까?”라는 아련한 죄의식과 “저렇게 버릴 수도 있는 목숨을 나는 쓸데없이 꼭꼭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무지에 대한 불안을 재빨리 없애주기 위한 것. 한마디로 자살 동기는 죽은 자의 사연을 설명하는 범주가 아니라 산 자에게 희망의 똥침을 놓기 위한 범주이다.

자살자에 대해 심각하게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진 이는 뒤르켐이다. 그가 자살을 산업사회의 병리현상으로 간주하고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지 한 세기가 지났다.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주로 자살 동기와 사회구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찾아내고 보완하는 데 주력해왔다. 이런 거시적인 접근에서 자살자는 사회적 환부를 드러내주는 하나의 징후일 뿐이며, 사회의 안티테제일 뿐이다. 자살자의 발언권은 전제되지 않으며, 자살자는 자살이라는 행위로만 기억된다. 이보다 좀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살자의 속내에 접근한 연구는 자살의 유형학, 혹은 자살의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경향들이다. 이는 ‘어떻게’와 ‘왜’ 사이에 주목해서 자살자의 심리상태와 자살의 방법 사이의 상관성을 찾기도 하고, 자살방법과 시대상과의 관계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든 자살에 관한 연구는 말없는 죽은 자를 대상으로 하는 까닭에 검증할 길이 없는 하나의 추론에 불과하며, 그렇기에 산 자의 의지가 개입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일 공산이 크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죽음을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면서 과학을 표방하는 데 일말의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문학이나 연극과 같은 허구의 서사장르가 자살을 형상화하는 게 더 온당해 보인다. 이 말은 반드시 서사장르로만 자살에 대해 얘기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과학을 표방한 연구라도 그것을 하나의 문학적 은유로만 수용하자는 얘기다. 내가 아래에 늘어놓는 자살과 추락에 관한 수다는 이런저런 책에서 주워온 사실들을 열거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내가 자살과 추락에 관해 갖고 있는 문학적 상상이다.

근대적 자살로서의 투신

자살에 성공하려면 흔히 세 가지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고 한다. ‘죽고 싶은 욕구’, ‘죽이고 싶은 욕구’,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 이 세 가지 욕구를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무게 중심에 자살자의 시신이 누워 있다는 것이다. 이 삼각형에서 ‘죽고 싶은 욕구’는 말 그대로 삶을 더이상 연장하고 싶은 의사가 없는 상태다. ‘죽이고 싶은 욕구’는 죽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된 원인 제공자에 대한 살의이다.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는 죽이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무기력하게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때의 자기 학대적인 감정으로, 살의가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상태이다. 세 가지 욕구가 폐쇄회로 속에서 돌고 돌다가 임계점에 달하면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논법은 내가 본 자살에 관한 해석 중에 가장 복잡하다. 그만큼 다양한 유형의 자살에 관한 해석이 가능하며, 특히 자살 유형과 자살자의 심리를 연결짓는 데 유용한 고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논법은 자살의 유형을 특정의 심리상태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자살자가 처한 환경적 변인을 무시한다. 사실 나무에 목을 매다느냐, 총을 머리를 쏘느냐, 빌딩에서 뛰어내리느냐와 같은 자살의 방법은 자살자가 처한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게 가장 설명력이 높다. 군대에서 총으로 자살하는 것은 총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며, 조선시대 여자들이 광목에 목을 매달아 죽는 것도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의 기사는 활로는 자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칼을 사용하고, 고층빌딩이 없었던 과거에는 투신할 장소가 없다. 이런 환경적 변인 이외에 자살의 유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변인은 자살자가 자살이란 퍼포먼스를 통해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이는 자살을 세상에 대한 하나의 무언의 발언으로 보고 자살의 방식에 내재된 감정이나 심리를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관점들을 종합해봤을 때 외형상 가장 단순해 보이면서도 심리적으로 가장 복잡한 자살의 유형이 투신자살이다.

특히 고층빌딩 투신자살은 가장 현대적인 자살의 유형이다. 우선 환경적으로 고층빌딩이 없던 시절에는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 방식이다. 빌딩 없는 시절의 투신은 주로 태종대 자살바위처럼 자연적인 절벽인 강물에서 이루어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물 속에 떨어지는 것은 삶에 대한 미련의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서 살아날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에 빌딩투신은 가장 자살의 의지가 확고할 때 선택하는 방식, 즉 ‘죽고 싶은 욕구’에 가장 충실한 방법이다. 또 신체 훼손이 가장 심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에도 충실하다. 가속도를 이용해서 지구 전체를 망치처럼 활용하니 이것만큼 강렬한 살인의 퍼포먼스도 드물다. 대개 동반자살을 기도하는 연인들은 빌딩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다리에서 강물로 뛰어든다.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나 피안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이니 죽고 싶은 욕구는 강하지만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는 없다. 시체를 훼손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서 어딘가로 떠나버리는 것이 그들이 목적이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고, 퐁네프의 연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 속의 연인들은 이 방식을 선호했다. 이들이 자살을 통해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는 가요. 찾지 말아요”이다. 빌딩투신의 메시지는 사뭇 다르다. 빌딩투신은 다른 자살 유형에 비해 유서를 남기는 확률이 낮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도심에서 이루어진다. 그 곳에서 ‘피떡이 된 시체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더이상 할말 없다 똑바로 쳐다봐라.”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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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새로운 가족윤리를 꿈꾼다 [3]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4]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