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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2]
2003-08-13

해체된 가족들, 쿨하게 살아가다

김소영/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이론과 교수

2. 여성의 성을 다시 포획하다

더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역사는 좋든 싫든 남자들의 것이다. 그러면 역사의 비주체로서의 여성? 그러나 이 도식적 성 정치학은 조금 더 꼼꼼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가족과 민족의 혈연, 피로 얽힌 관계는 사실은 현재로선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경계경보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이민과 이산과 혼혈이 세계화된 시대, 순수 혈연과 민족은 더이상 좋은 대상만은 아니다. 예컨대 영작과 호정이 사랑하는 아들 수인은 입양아다. 그 수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입양 사실을 놀릴 때 남들은 엄마가 배가 아파 나았지만 자신은 엄마가 마음을 앓아 태어난 아이라고 응수한다. 혈연으로부터도 벗어나 있고, 어린이며 돌연 비극적 죽음을 맞는 수인은 이 영화에서 가장 소수자이며, 문제가 많은 재현을 포함한다. 영화 초반부부터 자신의 의견을 정확한 언어로 전달하는 어린이 수인은 통상대로라면 미래를 알리는 목소리다. 그러나 그 수인이 자신을 납치한 지루- 아버지 영작에게 원한을 품은- 에게 예의 명석한 어투로 “던지지 않을 거지요?”라고 묻는 순간, 지루는 그를 밑으로 던져버린다. 떨어진 아이의 머리 주변에 고인 선명한 피는 이전 영작의 아버지가 뿜어내는 “더러운 피”와 더불어 이 텍스트가 가족 구성과 관계해 제시하는 두개의 담론- 부계적 혈연과 입양- 의 자기소멸을 암시한다. 부계적 혈연과 입양이 실패한 상태에서 영화의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전적으로 호정의 혼외임신에 달려 있다. <바람난 가족>에서 여자와 남자라는 성을 중심으로 냉전의 유물인 아버지를 축으로 한 무거운 과거와 다소의 낙관적 미래를 포함하는 현재로 나뉘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식 없이 가볍게 아이를 임신해 다시 행복해진 호정이 물론 여성주의적 꿈을 실현시키는 것은 아니다. 세대가 다른 여자들의 성을 처벌하지 않고 다루고 있고, 그들이 어딘가로 향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바람난 가족>은 이상한 방식으로 이성애와 가족 혹은 유사가족의 규범을 확인하게 해주는 영화다. 즉,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를 낳거나 다른 애인을 얻거나 하는 등의 대안을 찾는다. 그래서 그 대안은 규범 속에 존재하는 잉여다. 이러한 문제는 텍스트의 플롯이 전개되는 방식과도 일치하는데 모자이크식 방사형으로 이야기를 짜나가는 영화는 성과 세대가 다른 사람들을 다층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사실은 결국 중심으로 환원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영작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피를 토해내는 장면을 전후해 영작은 아들 수인의 타살로 이어지는 자동차 사고를 낸다. 또 아들 수인이 죽은 뒤 호정을 구타하고 욕을 해 그녀가 집을 나가는 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

그래서 텍스트의 무거운 중심은 여전히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의 죄의식, “더러운 피”의 문제다. 북에 남은 할머니와 여자 형제 6명은 다 죽었고, 할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살고 있고 아버지는 아내를 잃을 참이고 아들 영작 역시 아내와 아들 수빈을 잃을 것이다. 호정의 상대인 지운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읊조릴 때 관객은 문득 카라마조프의 남자들에게 어린 나쁜 운명 같은 기운을 영작네에게 느낀다. 아버지와 아들을 무의식적 중심으로 설정해 드라마를 정점으로 끌어올리며 파국을 보여주는 이 영화가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방식 역시 이성애/성기 중심이다. 페니스가 아니라 클리토리스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남성 상위 체위에서 여성 상위의 그것으로 바뀐 것이다. 거기에 삽입을 통한 오르가슴이라는 클라이맥스는 과대평가된다. 15년 만에 섹스를 하고 오르가슴을 느끼는 순간 60살의 여성은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호정은 임신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오르가슴을 줄 수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남성중심적 성 시혜주의 그리고 남성이 여성을 성 도구화하는 방식이 역으로 적용된 여성이 남성을 도구화하는 방식은 이 영화가 문제화하는 결혼과 가족으로 유지되는 이성애 제도와 또 그에 수반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해체를 어렵게 만든다. 호정과 미성년 남성과의 ‘원조 교제’는 평등한 관계라고 보기 힘들다. 즉 기혼녀가 바람난 것이 스캔들이라기보다는 그 미성년인 상대와 맺고 있는 관계 자체가 더 윤리적 문제로 보인다. 성적 도착성이 전복적이 되는 경우는 그것이 옛 섹슈얼리티 체제에 대한 통렬한 뒤집기를 감행할 때다. 그러나 바람난 가족이 섹슈얼리티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도착적, 전복적이라기보다는 정상성을 참조하는 거울 이미지와 같은 두쌍을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의 성 행위 중의 역할을 바꾸어놓고 거기에 약간의 사도마조히즘을 덧붙인 것이지 근본적 변태(보통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변하는 일)는 아닌 것이다. 영화의 도착성은 성행위의 재현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언어적 수행성을 통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일종의 발화 효과행위인 셈이다. 영작이 아들 수인을 잃은 아내 호정이 옆에 있는데도 연에게 강렬한 섹스를 요구하는 (실제로는 좌절될) 언어를 구사한다든가, 호정이 지운(봉태규)에게 클리토리스를 보았느냐고 묻는 등이 그렇다. 또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황석영 소설 에피소드와 섹스장면의 결합은 이탈리아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식의 섹스와 레닌을 결합시키는 혹은 섹스와 정치를 결합시키는 빌헬름 라이히의 방식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며 쌍X욕을 퍼붓는 장면은 벨로키오도 라이히도 아닌 영락없는 <바람난 가족>에서부터 존재해온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나쁜 남자들이다.

3. 마녀 날아가다

<바람난 가족>은 한국전쟁과 분단, 역사 그리고 성을 영화의 바탕에 놓으면서 <처녀들의 저녁식사>보다 훨씬 더 두터운 정치적 무의식을 텍스트의 육체에 통합시켰지만, 여성의 성을 이성애 관계 속에서만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성 정치 측면에서는 후퇴다. 저녁식사를 나누며 작은 공동체로 함께 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영화 초반부터 이야기하던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처녀들의 모습은 여기에 없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호정은 임신했으나 가벼운 몸짓으로 넓은 댄스 스튜디오를 청소하고 있다. 그런 호정에게 집으로 돌아올 것을 부탁하던 영작은 거절당하자, 마치 무용수처럼 가볍게 뛰어오르는 몸짓을 코믹하게 남긴 채 사라진다. 원했던 대답을 들었다는 듯. 그리고 마침내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양. 그뒤를 이어 호정이 마치 마녀처럼 대걸레를 들고 스튜디오를 날아다니듯 청소한다. 앞에서 지적했던 죄의식과 무거움이 날아가는 순간이다. 곧 어어부밴드의 스타일로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의 역설적인 음악이 흐를 장면이다. 또 영화에 흐르던 “더러운 피”를 마녀가 씻어내는 순간이다. 임상수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섹스 삼부작의 마지막이라고 했다. 다음 삼부작은 마녀 혹은 뱀파이어 시리즈? 나쁠 것 같지 않다.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1]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1]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3]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