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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을 위한 법률가이드> 펴낸 조광희·안지혜·조준형
이영진 2003-08-13

“계약서 샘플까지 보여드립니다”

좋은영화의 김미희 대표는 최근 다른 영화사에서 기획 중이던 프로젝트를 넘겨받으려다 답답함을 느꼈다. 캐스팅과 펀딩에 어려움을 겪어 난항을 거듭하던 프로젝트를 가져오려 하는데, 상대 제작사와 계약을 체결하는 데 있어 참고할 만한 자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영화인을 위한 법률가이드>(시각과 언어 펴냄)라는 책이 얼마 전 출간됐음을 알게 됐고, ‘기획·개발의 양도’라는 챕터를 뒤적이면서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아이디어 수준의 기획을 양도할 때와 분명한 결과물을 넘길 때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었고, 전 제작자가 여타 스탭들과 어떠한 계약을 맺었는가에 따라 양도 계약시 체크해야 할 사항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계약서 샘플까지 제시해놓아서 실제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비단 김 대표뿐일까. 400쪽 분량의 책을 펼쳐본 영화인이라면 누구라도 무릎을 칠 것이다. “법률을 모르고서 영화를 제작, 배급한다는 것은 교통규칙을 모르는 채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서두로 시작하는 이 방대한 책은 기획부터 유통까지 프로덕션의 전 공정을 아우르며,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분쟁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절차를 친절하고 꼼꼼하게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관련 법령집을 찾아보다 배배 꼬인 법조문 사이에서 길을 잃고 식은땀을 흘렸거나 자신의 권리조차 몰라서 맥없이 당하고난 뒤에서야 분통을 터트렸던 이들에게 특히 이 책은 유용한 지침서다. “관행에 따른다”는 애매모호한 조항들로 가득한 계약서로 인해 다툼이 일고 뒷말이 무성했던 충무로의 현실을 고려할 때 “가려운 곳을 조금 긁어주고 싶었다”는 저자들의 소박한 의도는 공정한 룰과 합리적 해결방식을 정착시키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책임집필자인 조광희 변호사와 안지혜, 조준형 등 2명의 영화학도가 함께 만들어낸 이 책은 앉아서 머리로만 쓴 책이 아니라는 미덕 또한 갖추고 있다. 계약, 저작권, 표현의 자유, 명예훼손, 프라이버시 등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 정의와 법률 해석에 이어 제시되는 구체적인 상황들은 실제로 오래 채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이는 지난해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무료 법률 강좌를 벌이고 여러 영화사들에 자문해준 계약서들을 가공해서 인터넷에 올려 공유할 수 있게끔 한 조 변호사와, 영화인회의에서 제작 및 배급환경을 개선하자는 취지의 연구를 진행하며 현장의 제반 문제를 눈으로 확인했던 두 사람의 경험이 결합하지 않았다면 기획부터 출판까지 1년 반 만에 이런 책을 내놓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 변호사와 2명의 공동집필자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 배운 것이 많았다”고 겸손해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들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한권의 책으로 묶여나오기까지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몇몇 출판사에 타진해봤지만, 돌아온 답은 하나같이 ‘노’였다. 상품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조 변호사가 밥 을 책임지고, 필요한 자료의 프린트는 조 변호사의 직장인 법무법인 한결의 복사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동안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 혜택을 받게 됐다. 조준형씨는 “운 좋게도 영화진흥위원회의 출판지원사업이 접수를 시작했고, 이때 받은 600만원의 지원금을 전제로 출판사를 섭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조 변호사 또한 “그걸 못 받았으면 아직도 책을 쓰고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안지혜씨는 이 책을 펴낸 시각과 언어의 기획편집실장이자 두 영화학도의 선배이기도 한 김소연씨에게 “영화계와 법조계가 사기 시작하면 초판 1천부가 팔리는 건 시간문제라고 둘러댔지만” 설마 “그가 우리의 말을 믿진 않았을 것”이라며 웃는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다. 이들에게 아쉬운 점을 물었더니 이미 엄정한 평가를 나눈 듯하다. 조 변호사는 “여러 가지 형태의 계약서를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무래도 갑과 을, 이해당사자가 얽히는 문제이다보니 어느 한쪽에서 보면 우리가 제시한 계약서 샘플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책에 제시된 샘플은 이상적인 문서라기보다 가능한 하나의 안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조준형씨는 “수출입 문제의 경우 행정 절차까지도 함께 알려주고 싶었는데 직간접적인 취재에 어려움이 따랐고, 특히 북한 영상물의 국내 반입이나 저작권 문제는 정보 부족으로 미진한 점이 눈에 띈다”고 답한다. 안씨 또한 “권리와 의무를 명기하자는 큰 원칙은 어느 정도 충족된 것 같다”면서도 “아무래도 국내 영화산업 환경 자체가 너무 빠르게 변하다보니 얼마 되지 않아 개정판을 속히 내야 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책이 어느 정도 팔렸냐는 질문에 출판사에 전화해본 이들은 여름이 끝나면 동이 날 것이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서 환호한다. 권당 인세가 얼마냐는 이야기로 이어지자, 3인은 계약서를 찾아보더니 그때서야 “초판 때는 인세를 못 받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중은 제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하긴, 제 머리 깎을 여유가 이들에게 있었을까.글 이영진·사진 손홍주

조광희 변호사 표현의 자유 쟁취 등 돈 안 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음. 2001년에는 헌법재판소로부터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등급분류 보류조치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끌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현재 법무법인 한결에 재직하면서 주요 투자·배급사와 제작사의 법률 자문직을 ‘싹쓸이’하고 있으나, 뜻 맞는 충무로 제작사와 영화단체, 그리고 독립영화인들에게는 돈 받지 않고 무료로 자문도 해준다. “장기적인 투자로 봐달라”는 것이 그의 말.

안지혜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뒤 방송사 프로듀서로 일하다 편곡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사표 던지고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에 진학했으나 한 학기만에 접었음. 이후 영화연출 공부를 위해 도미했으나 1년 만에 IMF 경제환란을 핑계로 슬그머니 귀국함. ‘한국 영화산업에서의 저작권 위탁관리’라는 주제로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현재 박사과정에 재학 중. 영화인회의 편집실장을 맡아 웹진을 운영하고 있는, 영화정책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 사이에선 왕언니로 불린다.

조준형 고려대학교 법학과 재학 중 법전은 뒤로 하고 인문학 서적을 탐독함.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일단 법대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정작 남는 시간은 문화학교 서울에서 영화보며 세미나하고 보냄. 몇 차례 보았던 고시는 결국 군복무 중 완전히 포기. 이후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후 한국영화 정책일을 맡아볼 인력이 부족하다는 영화계의 요청과 학교 교수님의 낙점에 의해 현재까지 영화인회의 정책실장직을 수행 중. 중앙대에 출강 중이며, 문화개혁시민연대 부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