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반핵 양키 고 홈!” 80년대 말에 대학가를 요란하게 했던 구호다. 미국이 남한에 배치한 핵을 철수하고, 외려 북에서 핵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어느새 “반핵”이라는 구호는 사라졌다. 그 많던 반핵론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침묵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어느새 찬핵론자로 돌변해 북의 핵무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중에는 핵, 핵, 핵(核核核) 가뿐 쉼을 내쉬며 미제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장군님의 정치예술을 찬양하는 포르노 스타들도 있다.
이른바 ‘NL’ 진영에서는 그동안 여러 번 논조를 바꿔왔다. 처음에는 요란하게 “반전 반핵”을 외쳤다. 이렇게 가열찬 평화주의자들이 다시 있을까 할 정도였다. 북한 핵이 문제되자, 북은 핵을 개발하고 있지 않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건 “미제의 모략”이라는 것이다. 핵개발 징후가 속속 드러나자 북은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 핵개발의 시늉만 내고 있을 뿐이라 했다. 마침내 북이 핵개발을 시인하자, 이제 ‘배 째라’고 나선다. 그건 자위용이라고 한다. 미국도 가진 핵, 북한이라고 왜 못 갖게 하느냐는 것이다.
굳이 말로 설명해야 하는가?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핵 보유국은 핵공격의 우선적 표적이 된다. 언젠가 일본 우익이 핵무장을 주장했을 때 옛 소련은 “그 경우 일본이라는 항공모함은 태평양 한가운데로 침몰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의 핵개발 사실이 알려지자 러시아에서는 곧바로 북한이 핵사용의 ‘징후’만 보여도 북을 선제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도대체 북한 정권이 무슨 권리가 있다고 민족 전체의 생존권을 볼모로 잡고 위험한 장난을 하는가?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을 받기 위해서란다. 무슨 놈의 체제보장을 미 제국주의자한테 받는단 말인가. 그건 미제가 아니라 인민에게 받을 일이다. 도대체 미제가 어떤 놈들인데, 그들이 해주는 개런티를 찰떡같이 믿는단 말인가? ‘자주성’을 위해서라고도 한다. 쿠바처럼 게딱지만한 나라도 핵없이 자주성 잘만 지켜나가더라. 대체 왜 핵이 필요하단 말인가? 북의 원자력 불장난을 잘하는 짓이라고 찬양하는 이른바 ‘NL’들의 다수는 실은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어느 나라 민족주의자가 도박판에서 민족의 생존권을 판돈으로 내건단 말인가.
이들의 망언은 역사가 깊다. 북한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이들은 그것도 공화국을 음해하려는 미제의 모략이라 했다. 사실이 드러나자 북한 인민의 아사는 미제의 경제봉쇄 때문이라 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때에는 위원장 동지도 인민과 함께 밥을 굶었다며, 당과 인민의 굳건한 결합을 강조했다. 북에서 탈북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자, 이들은 모두 공화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자들이라고 했다. 이런 망언을 하는 이른바 ‘NL’들의 다수는 민중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당과 수령의 안위만 있을 뿐, ‘민중’의 생존권이란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다.
자가당착은 이뿐이 아니다. 남에서는 ‘국보법 철폐’를 열심히 외치면서, 북한 인권을 거론하면 그건 “부르주아 인권 개념”이라고 비난한다. 그럼 ‘국보법 철폐’는 “부르주아 인권개념”이 아니란 말인가? 이들은 북한 인민에게 ‘인권’이란 곧 ‘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해괴한 논리를 펴는 이가 또 있었다. <월간조선> 조갑제 사장에 따르면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은 박정희야말로 실은 인권 투사라는 것이다. 왜? 한국민의 ‘밥’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니까. 이런 망언을 하는 조갑제씨가 민주주의와 별 관계없는 것처럼, 이른바 ‘NL’들의 다수도 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어느 진보정당에서 미국의 군사주의와 북한의 핵개발을 동시에 비판하는 논평을 냈더니 일부 NL들이 난동을 부렸다. 진보는 남이든 북이든 체제를 옹호할 게 아니라 그 체제를 사는 인민, 혹은 민중을 대변해야 한다. 북한 체제를 옹호하느라 민족, 민주, 민중의 가치를 내버린 이들은 더이상 ‘진보’가 아니다. 그저 북한판 국가주의자, 평양의 조갑제일 뿐이다. 아직도 30년대식 선전선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NL은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이다. 진보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 멀찌감치 처진 이들에게 발목 잡힐 필요가 없다. 진보여, NL이라는 시대착오적 이념의 족쇄를 벗고,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앞으로 훨훨 걸어나가라.
진중권/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