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힘들고 고단할 때, 마치 하늘에서 돌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오직 나에게만….’ -영화 <레이닝 스톤> 중
생활고에 지쳐 ‘죽기 싫어’를 외치는 자녀와 함께 뛰어내린 엄마, 자신을 구타하는 아버지에게 돌려 보낸다는 말에 겁먹고 뛰어내린 가출 초등학생, 임신과 성적을 비관해 뛰어내린 두 여고생들, 대북사업의 교두보였던 대기업 회장의 투신…. 사회면의 이 놀랍고 우울한 기사들 탓인지 우줄우줄 내리는 장마비가 ‘레이닝 스톤’처럼 여겨진다.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하던 당시 난 아무런 생각없이 영화사를 다녔다. 영화판 월급이야 초봉이 쥐꼬리만한지라 정말 생활비로 빠듯하였다. 소심한 나로선 카드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고 비상금 없이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두근거리며 회사를 다닌 것 같다. 이런 나한테 사회생활 3년차로 두 번째 직장에서 만난 어떤 선배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김정영씨 혹시 저금해요?” “네? 아뇨. 아직 저금이란 것을 못해봤는데요….” “이런, 이 사람아. 가장이 그런 생각도 없이 살면 되나. 사람이 어른이 될수록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혹시 무슨 일 생길 것에 대비해서 1천만원 정도는 현금으로 저금해두어야 한다고요.” 그렇다. 무슨 일이란 것이 예고하며 찾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 선배의 조언은 아직도 귀를 쟁쟁 울린다. 빚지고는 못 사는 소심한 성격인지라 지금도 프리로 영화 시나리오 개발을 하며 외면할 수 없는 생활을 병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이런 원고도 쓰면서^^)를 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남들이 영화 일을 하는 것만 해도 배부르지 너가 좋아서 하는 선택인데 어쩌고 하면 할말 없지만 때론 간간이 나를 엄습해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아니 정확히 말해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문득문득 들 때가 많다.언제까지고 이렇게 젊은 알바생인 척 가장하며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진행할 영화로 떼돈 벌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럴 땐 ‘켄 로치’ 할배의 영화들을 떠올리며 마치 진통제 처방을 한 것마냥 스스로 불안감을 정리를 한다.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그리고 격렬하게 정리시키는 그의 영화들을 말이다. 영국의 작은 마을. 주인공 밥은 실직자, 그나마 있던 낡은 트럭마저 도난당한 그에게 작은 소원이 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7살짜리 딸래미에게 첫 번째 성찬식에 입을 예쁜 드레스를 하나 마련해주는 것.그는 그 드레스의 선금을 치르고 집까지 걸어간다. 이제 남은 돈을 이른 시일에 마련해야 한다. 그는 양도 훔쳐 팔았고, 하수도 청소부로 오물을 뒤집어 써보기도 하고, 보수당사 잔디를 훔치기도 하고(이 행동 무지 마음에 든다), 나이트클럽 경비원으로 취직하기도 한다. 그의 고군분투는 그때마다 해고를 당하거나 사고가 생겨 낭패를 본다. 어쩔 수 없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는데 그것도 어찌 잘못되어 그가 없는 틈을 타 밥의 부인과 딸을 위협하는 사채업자에게 화내며 싸우는 중 사채업자가 모는 차가 사고가 나 사채업자는 죽고 만다. 하늘에서 내리는 돌멩이 비처럼 자꾸 나쁜 일만 생기고 밥은 성당에 가서 고해하는데 신부님은 “빵이 곧 삶인 이들을 위해 자넨 정의로웠네”라고 묵인해준다. 그리고 나오다가 경찰을 만나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밥에게 그 경찰은 밥의 잃어버린 트럭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영화 <레이닝 스톤>의 줄거리다. 보는 내내 실직의 징글징글한 현실, 꿈도 없고 미래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영국을 보여주지만 이상하게 그의 영화를 보고 난 뒤 마음이 조용히 불타오른다. 뭐랄까? 삶에의 투지랄까? 묘하다. 결코 빈곤을 대상화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데 관객은 그렇게 된다. 게다가 살짝 유머까지 있으니 보고나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우리 모두 마음이 착찹할 때 선배가 이런 혼잣말을 했다. “아티스트들은 대체 뭐하는 거지. 아티스트라고 자기가 스스로 떠든다면…” 하면서 말을 아낀다 .센세이셔널한 폭로나 비판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TV와 신문에서 지겹게 나온다. 그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둔감함과 무기력함에 채찍이 되지 못한다. 어디 한귀퉁이에서라도 켄 로치 할배 영화같이, 우리가 나락에 떨어질 것 같을 때마다 꺼내놓고 보면서 모종의 의지가 불타오를 작품들이 만들어졌음 한다.
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sicksadworld@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