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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1]

감독 임상수 배우 문소리의 싸우며 영화찍기 5막7장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촬영장 잠입 취재기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것은 이후 얼마나 완성도 있는 결과가 나왔는지를 떠나, 그 자체로서 경이로운 경험이다. 관객은 체에 잘 걸러진 빛나는 장면의 이음들만을 보게 되겠지만, 스크린 뒤에서 만나는 일들은 상상, 그 이상의 천태만상이다. 화장기 없는 배우의 부스스한 등장과 개봉쯤엔 평상심의 귀재인 척하는 감독들의 감정의 수위가 하늘끝 땅끝까지 널을 뛰는 국면들, 순간의 아이디어가 영화 전체의 색을 바꾸는 운명적인 모멘트, 그러나 무엇보다 빛나는 순간은 저마다 다른 임무에 여념이 없던 스탭들이 ‘액션’이라는 구령을 시작으로 온전히 한 목적만을 위해 동시에 몰입하는 몇분간이다. 마치 단체오르가슴이 터져나오는 난교의 장 같은, 그러나 흔한 교성조차 뱉을 수 없는 정적 속에, 몸을 뒤척이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경직 속에 비로소 신성해지는 촬영장이야말로 영화라는 세공품의 제조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단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 초, 찬바람이 살을 에는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 ‘빤스 벗고 덤비는’ <바람난 가족>의 촬영장을 누비며 퍼담은 이 기록들은, 우리 이렇게 고생했어요, 혹은 우리 이렇게 재밌었어요, 식의 따뜻한 제작기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한편의 영화가 마침내 시작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대한 그리고 마침내 관객의 망막에 잡히기까지의 긴 기다림에 대한 짜증나는 일기일는지도, ‘한성깔’ 한다는 임상수 감독과 ‘한고집’ 한다는 문소리라는 배우의 아슬아슬한 전선을 따라가는 기자의 주관적 관음의 기록일는지도 모른다. 임상수 감독과 배우 문소리를 만나 검증받은 뒷이야기를 더해, 평론에 난도질당하고 홍보에 유린당하기 전, 날것 그대로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그 펄떡이는 생선에 대한 좌충우돌 어획담을 풀어놓는다.

바람이 모이다

<마지막 연애의 상상>이란 임상수 감독의 시나리오가 문소리의 손에 떨어진 건 <오아시스>로 한참 정신이 없었던 지난해 8월이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르지만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호정’이라는 캐릭터에 욕심이 생긴 문소리는 “책임을 못질까봐 걱정이지만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명필름의 이은 대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사정상 좀 힘들게 됐지만 다음엔 꼭 작품 한번 하자”는 거였다. “뭐 캐스팅 상황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어요.” 이후 <바람난 가족>이란 조금은 노골적인 제목으로 탈바꿈한 이 영화의 ‘호정’ 역은 김혜수로 결정되었고 그동안 실제적으로 벗어보인 적이 없었던 ‘글래머 스타’ 김혜수가 ‘벗는다’는 것만으로도 이 캐스팅 뉴스는 세간에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알려졌다시피 크랭크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김혜수는 드라마 <장희빈>의 출연을 결정하게 되었고 김혜수와 명필름 사이의 공방은 법정까지 갈 위기에 처했다. 문소리가 급하게 만나자는 명필름의 전화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앞뒤 사정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못하면 비교당할 게 뻔한데 선뜻 하겠다는 생각은 안 들던데요.” 임상수 감독은 “하든 안하든 한번 보자”고 “당신 아니면 안 된다”라고 설득했지만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을 지지하지만 이번엔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거절의 대답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3번쯤 거절의 뜻을 밝혔던 어느 날, 문소리는 종이를 반 접어서 이 영화를 해야 할 이유와 안 할 이유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아시스>고 베니스영화제 신인상이고,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내가 과연 이 영화를 거절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앞둔 여진이 언니라면 어땠을까? 이런 제작사에, 감독에, 시나리오에 내가 안 했을까? 그간 상받은 거에 대해 아무런 의미를 안 둔다고 말하면서도 나 지금 뭔가 계산하고 있지 않나? 사심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반문이 들더라구요.” 그런 생각에 이르니 모든 게 명료해졌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기류가 엉키다

“시나리오를 읽은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은 다 알겠는데 호정이는 잘 모르겠다는 거였어요.” 결국 작품에 들어가기까지 이들에게 화두는 ‘도대체 호정이 누구냐’였다. 그러나 시나리오에 대해 세세하면서도 나긋나긋하게 질문을 던졌던 김혜수와 달리 문소리는 괴상하고 관념적인 질문들로 임상수 감독을 괴롭혔다. “쿨한 게 도대체 뭔데?, 당신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쿨한 여자의 정체가 뭐냐?, 혹시 호정이란 여자 당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자들 조합해놓은 거 아니냐?”(문소리)

“아, 그런 토론 저 정말 싫어하거든요. 뭐가 나올는지는 찍어봐야 아는 거죠. 나 역시 잘 모르면서 찍는 거거든요. 그런데 모호한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아마 영화가 끝나도 호정이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안 나올 거라는것도 알았구요.”(임상수)

임 감독은 소설책, 비디오도 권하고 호정의 모델이 될 만한 여자도 만나게 했지만 그 어디에도 호정은 없었다. “임 감독은 이창동 감독과 정말 다르죠. 이창동 감독은 내가 뭔가에 대해 반문하며 ‘내가 너를 끝내 설득하고야 말리라’는 자세로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하는데 임상수 감독은 그런 걸 되게 귀찮아해요. 그게 중요해?, 당신 왜 이렇게 관념적이야? 아, 좀 구체적으로 시나리오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 좀 하자, 고 하거든요.” 그때, 두 사람의 격렬한 대화를 한참 지켜보던 황정민이 한마디 건넸다. “소리야, 캐릭터를 자꾸 니쪽으로 끌고 오려고 하지마. 그냥 니가 캐릭터를 저기에다 놓고 그쪽으로 다가가려고 해봐.” 결국 며칠간의 토론 끝에 ‘쿨’한 호정에 대한 정의는 “뜨거움을 가지고 있되 마지막의 태도를 세련되게 하는 여자”로 나름대로 결론지은 상태에서 촬영날은 다가왔다.

도대체 이 감독과 이 배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나 별 도리없다. 임상수 감독의 말대로, 어떻게 될지 다 알면 왜 찍나, 뭐가 될지 모르는 거니까 일단 한번 가보는 거다, 찍어보는 거다.

바람이 분다.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레디, 액션!!!!!’ 같은 우렁찬 구호 대신 ‘시∼작!”이라는 경쾌한 말로 슛을 시작하는 이 촬영장은 이상하게 조용하다. 감독이 배우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도, 스탭들끼리도, 늘 조용조용한 목소리를 유지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성질 안 좋은’ 임상수는 도대체 어디로 갔나? 그 사이 득도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나 속지마라. 문제는 소리의 고저가 아니라 찌르는 깊이였다.

#71 창근씨 댁 안방 2002년 12월 8일

병한: 나 요새 생전처음 오르가슴이란 걸 느껴… 내가 이 나이에 이럴 수 있다는 거. 니들은 이해가 안 되지? 얘야 인생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더라. 솔직하게, 자기 느낌대로… 그렇지 않음 그게 사는 게 아냐… 하루를 살아도 사는 듯싶이 살아야지, 응?

호정: 그럼요.

첫 촬영에도 불구하고 이 노련한 윤여정이란 배우는 감독의 요구를 한눈에 읽어낸다. 문제는 네명이 한숏에 잡히는 이 신에서 젊은 두 배우의 리액션이다. 황당하다, 기가 차다, 듣기 싫어 죽겠다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황정민의 리액션은 감독의 마음에 쏙 드는데 문소리의 리액션은 어째 좀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어이, 소리씨 그런 리액션은 술집 작부 같지….” 얌전하고 착한 촬영감독 김우형의 가슴은 콩당콩당 뛴다. ‘허허헉… 저 감독이 미쳤나… 배우한테 저게 뭔소리야.’ 촬영이 끝나고 술자리에서 문소리가 한마디 한다. “이거 보세요! 당신 그러면 안 돼. 배우한테 술집 작부가 뭐야, 술집 작부가! 똑바로 하세요!”

상수 생각: 제 말하는 방식이 사람 기분 별로 안 좋게 만든다는 건 알거든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것도 반성하는 부분인데, 사실 그 이상으로 적확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이 고급스럽게 조금 안 천박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이러는 것보다 가장 정확하고 빠른 디렉션이니까요. 그래도 그날 이후엔 조심하려고 노력했다구요.

소리 생각: 이창동 감독은 뭐가 맘에 안 들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만 계세요. 결국 배우가 자진해서 감독님 이렇게 해볼까요? 뭐 이렇게 눈치를 보는데 임상수 감독은 바로 튀어나오거든요.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거였어요. “소리씨, 이거 너무 어벙한 거 아냐?” “허 참, 주연 여배우가 어벙하게 나오면 이 영화 참 잘도 되겠네요.” 처음엔 감정 많이 상했죠. 갈수록 적응이 좀 됐지만.

12월 중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문소리는 술을 먹고 펑펑 울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엄청 헤매고 있는데 큰일났다, 끝장났다, 진짜 이 사태를 어떻게 돌파해야 하냐’는 거였다. 그 동안 장편 두편과 여러 편의 단편을 하면서 모든 영화들의 카메라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해 있었다. 그러나 11월 한달 동안 찍었던 <바람난 가족>의 카메라는 오히려 자신의 시각이 되어 주변을 지켜보는 식이었던 것이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금 이 영화에서 뭘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문소리의 불안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한 것은 평창동 대저택에서의 촬영부터였다.

#49 영작네 거실

2003년 1월 8일

호정: “처녀 때야 인제 결혼하면 섹스는 좀 맘껏 하겠구나 하고 기대 하잖아… 근데 결혼하고 좀 지나면 어디 그러니? 여자도 아니구, 무슨 중성적인 취급 받잖아. 솔직히 얘기해서 난 결혼하구나서 오히려 섹스를 더 안 하는 것 같애… 처녀 땐 그래구 유부남에 총각에 숫총각에… 그래, 약혼녀 있는 놈, 다양했잖아….”

어두운 거실에서 친구와 아슬아슬한 통화를 나누는 이 장면을 찍으며 임상수 감독은 문소리에게 요구하는 게 유난히 많아진다. “나는 더 아줌마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봐, 점잖게….”(임상수) “점잖은 아줌마가 어딨어요?”(문소리) “그 말이 아니라 지금 대사는 좀 학생스럽다고, 꼭 처녀가 말하는 것 같거든….” 다음 테이크에서 문소리가 목소리 톤을 좀 낮추자 이번엔 악센트가 잘못 가서 붙었다고 한마디 한다.

상수 생각: 배우들은 뭔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신이 주어지면 잘하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거든요. 까불면서 하고 싶었던 거죠. 물론 유머러스한 대사지만 나는 어른이 국어책 읽듯이 하는 대사를 좋아하거든요. 예뻐보이게 대사를 하는 것보다 우아하고 점잖게 하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문제로 배우들하고 싸웠어요. 이번에도 원하는 게 잘 안 나오니까 자꾸 이상한 트집만 잡다가 잠시 사라져 버렸는데 ‘화나서 사라졌구나’ 눈치를 챘나 봐요. 다행히 소리씨와는 그게 촬영 중 마지막 의견 충돌이었어요. 그리고 소리씨에게는 집에서 찍은 신들이 큰 의미로 다가온 것 같아요. 이 집의 주인은 자신이고 작품의 주인도 자신이라는, 그래서 집 촬영이 끝나고 나서는 완전히 작품에 대해 감을 잡은 것 같더라고. 집 나오면서 술을 엄청 먹었는데 술먹고 “감독님, 나 이 영화 찍기로 한 거 정말로 잘한 일 같아요” 그러던데요.

소리 생각: 나는 그때 이 여자가 내뱉는 전화내용들이 진심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그 대사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거구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건 그냥 친구한테 우아한 척하는 허풍이거나,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결국 감독님이 맞았던 거죠. 그런데 그날 감독님이 사라졌대요? 난 전혀 몰랐는데요?

▶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1]

▶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