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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2]

#101 영작네 방

2003년 1월 15일

영작: 고딩이 데꾸 원조교제하는 니 마누라 좀 말려달라는 말 듣고, 난 난 어쨌으면 좋겠니?.

호정: 가르쳐 줘? 응? 신경 꺼. 신경끄구 니 인생이나 똑바로 살어.

영작이 호정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이마를 민다.

영작: 잘났다. 잘났어. 니가 뭐가 그렇게 잘났니. 이 쌍년아. …

갑작스런 사고로 아들을 잃은 영작과 호정이 격하게 싸우는 장면은 4분이 넘어가는 신이었다. 대부분 핸드헬드로 찍어낸 이 영화에서, 이렇게 배우들의 눈높이에 맞춰 기민하게 찍어야 되는 신에서는 김우형 촬영감독의 소박한 키가 여러모로 장애요인이다. 결국 스티로폼 두장을 키높이 구두처럼 신발에 붙이고 촬영에 들어간다. “아, 꼭 가제트 형사 같지 않아요?” 임상수 감독은 이 상황이 재밌는 눈치다. 임 감독의 사악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잘려나간 신 중 “원래 영작이 걔가 좀 정의로운 척하잖아”란 대사가 있는데 문소리가 촬영 들어가기 전 그 대사를 떠올리며 “정민이 오빠가 좀 정의로운 척만 안 하면 이 테이크 빨리 끝나요”라고 농담을 한다. 임상수 감독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쪼르르 달려가 황정민에게 ‘소리가 그러더라’고 전하자 황정민의 얼굴에 ‘발끈’ 하는 기력이 역력하다. 이렇게 전의를 북돋워놓자 상황은 쉽게 풀려간다. 김우형 촬영감독이 요구한 마지막 한번 더까지 포함해 13번째 테이크에 오케이가 나자 오히려 문소리가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 황정민의 한쪽 눈가가 티가 날 만큼 부어오른다.

상수 생각: 내 친구가 영화를 보고 영작의 재수없는 대사도 니 말투고, 호정이 대사도 니 말투 고대로더라고 하더라구요. 마치 다중인격자의 인격들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이런 신은 액션의 합을 짜는 것보다 그냥 배우들 감정대로 놔두자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한대 맞고 정신 못차리기에 이 신 좀 힘들겠다 생각했는데 나중엔 소리씨가 더 강하게 덤비더라고. 독한 여자, 배짱있는 배우예요.

소리 생각: 실제로 때리라고 해서 조금 황당했어요. 처음 맞는데 정신이 혼미하면서 눈물이 확 나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18, 19살 먹은 여배우도 아니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들겠던데요. 그런데 4, 5테이크가 되자 매맞는 부인들 심정을 알겠더라고,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 할 것 없이 그만 때리라고 싹싹 빌고 싶더라구요. 그 이후부터는 죽기살기로 나도 팼죠. 나중에 모니터 보고서야 알았어요. 내가 정민 오빠 얼굴을 집중적으로 팼다는 걸, 미쳤죠, 배우 얼굴을 그렇게 만들다니. 그 다음날 나도 목이 안 돌아가서 한의원에 가긴 했지만.

#25 영작네 거실

2003년 1월 17일

먼 달빛에 실루엣으로 보이는 호정의 나신. 코드리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튼다. 리듬을 타는 몸. 와인을 마신다. 물구나무를 선다. 문득 얇게 쳐진 커튼 뒤에 숨어서 창 밖 지운이네 집을 본다. …호기심 어린 호정의 표정. 두꺼운 커튼을 친다. 이윽고 그녀는 한 마리 암고양이가 된다.

야참으로 통닭이 배달되어 왔는데 문소리는 입에도 안 댄다. “홀딱 벗는다고 생각해봐요, 뭐가 넘어가나.” 알몸으로 마치 물 흐르듯이 거실을 장악하는 이 신을 앞두고 문소리는 며칭을 생식으로 버텼다. “계속 벗고 찍어요?” 어려운 듯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임상수 감독이 대답한다. “겨우 3분인데….” “3분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거실을 암고양이처럼 휘젓는 장면을 앞두고 이상하게 ‘못 벗겠다, 안 벗겠다’는 식의 대화는 오가지 않는다. 오히려 모니터 앞에 앉은 스탭들이 “카메라쪽으로 돌릴 때 보인 것 같거든”, “모니터상에 확인할 수 없는 1초도 안 되는 거란 말야”, “이런 정도의 앵글이면 마스킹 안 하고 가는 게 심리적 안정감이 들지 않아?” 하며 음모노출에 대해 한참 설전을 벌인다. 갑자기 문소리가 일어서면서 크게 외친다. “야, 야, 빤스 입고 찍자.”

소리 생각: 홀딱 벗는다니까 아버지가 호적에서 판다고 그러던데요. 그래도 강간당하고 이러는 신 찍으면 마음도 무겁고, 기분이 더 더럽죠. 이런 신은 자신의 공간이고 가장 편하고 즐거운 곳에서 하는 일인데 내가 여기서 울고 그러면 되겠어요? 그래도 모르죠, 밤에 자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지도….

지난해 12월 말에 무용지도를 도와줬던 안애순 선생님의 무용단에서 올린 <하얀 나비의 비명-아이고>를 보았던 문소리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얇은 팬티 하나만 입은 전라의 무용수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시커먼 무대의 끝에서 끝까지 몸의 모든 근육을 써가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몸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언어에 빠진 것이다. ‘그 사람의 가슴이 어떻네, 엉덩이가 어떻네 하는 생각이 전혀 안 들던데요. 결국 행동의 주체의 의도가, 마음이, 그 태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가 결정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노출신에 대해 걱정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분명 이 영화를 보는 몇천명은, 몇만명은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고. 그러나 주체의 의도가 분명하다면, 그저 호정의 생활로 받아들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니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고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되었던 물구나무서기가 벌떡벌떡 되기 시작했다.

# 111 무용실

2003년 2월 16일

호정: 천천히 천천히 해….

지운이 엉거주춤 몸을 든 채로 삽입을 시도한다.

호정: (킬킬대며) 구, 멍, 이, 어디 있을까?

촬영도 어느덧 막바지다. 촬영장에 놀러와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영작의 애인 역인 백정림을 보며 문소리는 “좋겠다, 넌 촬영 끝났구나… 나도 내일부터 개도 먹고, 닭도 먹고 다 먹을 거야” 하며 부러운 눈치다. 그러나 이내 가장 클라이맥스라고 할수 있는 이 신을 앞두고 웅크리고 앉아 곰곰이 감독의 설명을 듣고 있는 문소리는 예민하게 촉수를 세운 고양이 같다. 디테일한 섹스신을 앞두고 임 감독은 몸을 던지는 지도와 시범동작을 보인다. 새벽 3시40분까지 조용한 세종대 무용실은 “빤스를 벗길 때는 말이야…” 하는 경험담과 “첫 섹스의 순간은 오히려 진지하기보다는 서툴고 재밌고 그렇지 않나요?” 하는 토론이 이어진다. 결국 임상수 감독은 서부의 보안관 같은 자세로 봉태규 위에 걸터앉아 정신없이 옷을 벗어던지는 문소리의 대역을 해보인다. 갑자기 임상수 감독이 문소리에게 다가가 묻는다. “그러다가 울면 어떨 것 같아요?” “해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카메라가 서서히 빠지고 교성이 흐느낌이 되고 결국엔 울음이 된다. 문소리가 흐느낀다. 어린 봉태규의 사타구니에 걸터앉아 온몸을 휘저으며 흐느낀다. 새벽의 무용실이 문소리의 울음소리로 아련하게 덮일 때쯤 조용히 ‘컷’사인이 떨어진다. 촬영을 끝낸 봉태규의 몸이 모니터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린다. 손에 붕대를 감고, 가운으로 몸을 덮고 물로 입을 헹구는 문소리는 마지막 라운드를 끝낸 권투선수 같다. 그렇게 촬영은 전투구나. 이 발칙한 영상들은 어떤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할는지는 몰라도, 가슴이 크게 작네, 쉽게 떠들어댈지 몰라도, 이들에게 촬영은, 영화는, 연기는 한없이 진지한 전쟁이구나.

소리 생각: 너무나 오랜만에 극도의 오르가슴을 느끼는 게 뭘까? 꺽꺽거릴 수도 있지 않나, 대성통곡을 해야 하나? 그런데 운 게 잘한 걸까? 잘못한 게 아닐까? 혹시 신파라고 느껴지면 어떡하지?

상수 생각: 처음부터 이 신은 두컷으로 찍겠다고 생각했어요. 첫컷은 화끈하고 유머러스하게 두 번째 컷은 세상 어떤 여자라도 부러워할 만큼 격정적으로. 그런데 우는 건 혹시 오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소리씨에게 편집은 울기 직전 오르가슴에 오른 상태쯤에서 잘라낼 수 있도록 찍겠다고 했고 촬영감독에게는 혹시 소리씨가 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빠지지 말고 조금 지켜보고 있다가 빠져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런데 소리씨가 연기를 끝내는 순간 나는 모니터를 보지 않아도 이건 오케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편집에서 리듬상 덜어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함은 여전했지만, 이렇게까지 배우가 꼭 보듬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에필로그

2달 반, 46회차 촬영이 모두 끝났다. 그러나 영화는 한참 동안 그들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몇번의 모니터를 통해 프린트를 뽑고 다시 편집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임상수 감독이 황정민, 문소리와 함께 술 한잔 하는데 기분이 진짜 꿀꿀했다. “투자자도 없지, 배급도 없지, 개봉날짜도 안 잡혔지. 힘날 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게다가 갑자기 술자리에 나타난 김인식 감독이(임상수 감독과 개인적으로 매우 친하다) “야, 충무로에 이 영화 잘되면 눈알 판다고, 손에 장지진다고 하는 사람들 많더라”는 정말 심장 후벼파는 소리를 하는 거였다. 문소리는 그 자리에서 속상해서 엉엉 울었다. “그땐 다 내 책임 같은 거예요. 배우의 임무가 현장에서 열심히 하는 것만이 아니구나, 내가 별로 유명하지 않으니까 투자·배급에 다 영향을 끼치는구나.” 임상수 감독 역시 “누가 눈알을 판대? 내가 확 파버릴까보다” 하고 농담을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지만 해보자, 시간도 많은데, 후시(녹음) 백번이라도 하자. 편집 만번이라도 하자. 투자·배급 될 때까지, 개봉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할 때까지 해보자.

지난 7월31일, 임상수 감독과 문소리는 <바람난 가족>이 오는 8월27일부터 열리는 베니스영화제의 경쟁부문인 ‘베네치아60’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원래 겸손하지 않은 임상수 감독의 어깨는 더욱 으쓱해졌고 문소리는 2년 연속 베니스를 가는 행운의 배우가 되었다. ‘마지막 연애의 상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8월엔 충무로 안과가 바빠질지도 모를 일이다.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제공 명필름

▶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1]

▶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