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MBC의 시트콤 <세친구>가 종영되었다는 사실은 이곳 미국에서도 큰 화제였다. 일요아침드라마 <눈으로 말해요>와함께 비디오에 담겨 한국식품점을 통해 대여되면서, 그 인기가 한국 못지않았기 때문. 특히 한국에서와는 달리 지나간 방영분이라도 언제든지 비디오로
빌려볼 수 있었던 까닭에, 아예 1회부터 마지막회까지 한편도 빠뜨리지 않고 시청한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였던 것이다. 물론 정상에 있을 때 과감하게
종영하는 모습을 보여준 점을 높이 살 만하지만, 조금 더 오랫동안 <세친구>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사실. 그렇다면
외주제작사인 ‘조이TV’가 방송사를 바꾸어 새로워진 <세친구>를 선보이는 것은 어떨까? <세친구>를 둘러싸고 외주제작사와
MBC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한국 방송계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외주제작체제가 확고하게 시스템화돼 있는 미국에서도 이런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외주제작사와 방송사간의 계약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있지만, 양쪽 모두 서로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쉽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듀서의
권한이 막강해지고 그들이 방송사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인기 프로듀서가 만든 인기작들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져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결국 <세친구>가 종영을 하던 즈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연일 엔터테인먼트 관련
TV프로그램의 주요 뉴스로 다루어진 그 사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에서 한때 <미녀와 뱀파이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사라 미셸겔러 주연의 인기 TV시리즈 <`Buffy, the Vampire Slayer`>.
1997년 3월 방영을 시작한 <미녀와 뱀파이어>는 현재까지 모두 다섯번의 시즌 동안 100회(5월22일 방영)가방영되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려왔던 작품. 주인공 버피 역의 사라 미셸겔러 이외에도 수많은 틴에이저 스타들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저 <미녀와 뱀파이어>의 단역급에 불과한 엔젤로 출연하다가 매력적인 캐릭터 때문에 1999년 <엔젤>(Angel)이라는
제목의 새 TV시리즈의 주인공이 된 데이비드 보레네즈일 것이다. 이런 <미녀와 뱀파이어>의 인기는 당연히 이 시리즈를 방영해온 워너브러더스의
계열방송사 <`WB`>가 지난 4년여간 TV시리즈 부문에서 공중파 방송사들(<`ABC`> <`CBS`> <`NBC`> 등)과 어깨를 나란히할 만큼 막강한 시청자층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은 지난해 가을, <미녀와 뱀파이어>의 제작사인 20세기폭스TV의 프로듀서 조스 웨돈과 <`WB`>간에
의견충돌이 발생하면서부터다. <`WB`>가 방영하고 있는 TV시리즈 중에서 세 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WB`>의 지원과 대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왔다는 것이 조스 웨돈의 주장이었다. 물론 <`WB`>는 <미녀와 뱀파이어>에 특별한 계약조건을
허락할 경우, 다른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 틈을 이라는
또다른 방송사가 파고들었고, 인기 TV시리즈의 방송사 이전이라는 초유의 결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번 계약에 따라 은 2년간 <미녀와 뱀파이어>의 방영을 위해 약 1억3천만달러를지불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44편 기준으로 볼 때, 편당 약 240만달러로 <`WB`>보다 50만달러를 더 지불하는 셈. 제작사와
프로듀서의 입장에서는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는 당연한 ‘말 갈아타기’일 수밖에 없었던 것. 팬들의 입장에서도 최소 2년간 새로운 <미녀와
뱀파이어> 시리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 하나의 문제는 세인트 루이스처럼 미국의 일부지역에서는 <`UPN`>을
볼 수 없다는 사실. 한편, <`UPN`>의 입장에서도 이미 검증된 TV시리즈를 도맷금으로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점에서 손해볼 게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UPN`>이 계약이 끝나자마자 주연급 배우들과 주요 제작진들에게 1인당 약 5만달러에 해당하는 선물공세를 펼쳤다는
사실은 <`UPN`>의 기대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엉뚱하게 피해를 보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창 인기를 끌어가던 <미녀와 뱀파이어>의 외전 <엔젤>이
그 대표적인 예. 버피가 <`UPN`>으로 옮긴 상황에서 <엔젤>이 <`WB`>를 지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진 <`WB`>가 <엔젤>을 중도하차시키고 <`UPN`>이 <엔젤>마저도 끌어와
방영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아직까지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없는 상태. 특히 <미녀와 뱀파이어>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교수
가일의 캐릭터를 확장해 새로운 시리즈로 분리하는 방안이 제작사와 프로듀서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중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엔젤>의
운명은 더더욱 한치 앞을 모르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여하튼 이렇게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진정한 외주제작 혹은 프로듀서의 시대가 돌아왔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다시 말해 양질의 콘텐츠를 창조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파워가 부여될 수밖에 없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에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을 바꿔 탄’ <미녀와 뱀파이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 <미녀와 뱀파이어> 공식 홈페이지 http://www.buffyslayer.com/
■ 팬 사이트 <더 슬레이어> 홈페이지 http://www.theslayer.net/main.html
■ 팬 사이트 <서니데일 슬레이어스> 홈페이지 http://www.enteract.com/∼perridox/Su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