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은 무섭다. 그래서 복도식 아파트가 싫다. 초고층 주상복합까지 들먹일 것 없이 평범한 10층 아파트라도 벽에 바짝 붙어서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걷는다. 한번이라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가는 뛰어내리고 싶어질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이미 매혹되었다. 그래서 두렵다. 맞섰다가는 당장 투항할 게 틀림없기에 아예 접근하려들지 않는다.
<애쉴런스 콜2>에 접속한다.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 종족을 휴먼으로 선택한다. 길이 있다. 높은 언덕부터 까마득한 광야까지 곧게 한줄로 뻗어 있다. 꼭대기에 서서 내려다본다. 게임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게임은 요즘 MMORPG들 중에서도 빼어난 그래픽을 보여준다. 섬세한 세부묘사는 약간 떨어지지만 대신 자연은 현실보다 더 웅장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캐릭터뿐 아니라 모든 세계가 완전히 3D로 구현되어 있다. 영화세트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한면만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쪽에서 보든 완벽한 입체로 구현된다. 물론 높이도, 원근감도 있다. 산꼭대기와 평야는 평면에 그려진 눈속임이 아니다.
경사진 비탈길이 보인다. 한번 뛰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길은 평야에서 끝나지만 뾰족한 산들이 온통 둘러쳐져 있다. 산들 사이, 가장 깊숙한 곳에서 도시가 하나 발견된다. 건물들에 한참 홀렸다가 문득 눈을 들어 높이, 더 높이 올라가다 보면 산봉우리가 갑자기 끝이 나고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하늘의 별과 구름이 들어온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이질적 세계의 광활함과 막막함, 그리고 기대감에 숨이 막힌다. 이곳이야말로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갈 공간이다. 겁이 나지만 두근거리기도 한다.
산과 강, 길과 도시는 사실 배경에 불과하다. 게임세계의 삶이 펼쳐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간을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잠시 제쳐두고 그저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때가 있다. 멀쩡히 가야 할 길을 놔두고 슬쩍 옆으로 빠진다. 시냇물에 뛰어들어 첨벙거린다. 깊어지면 헤엄을 친다. 비탈을 타넘고 뛰어다닌다. 발디딜 곳만 찾아내면 의외로 꽤 높은 곳까지 기어올라갈 수 있다. 숲과 초원, 갯벌과 사막으로 이리저리 방랑하며 세계를 탐색한다.
현실에서는 이럴 수 없다.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넋놓고 다닐 시간이 없다. 사하라 마라톤에 도전할 체력이 없다. 아프리카 종단 열차를 타고 싶지만 너무 비싸다. 카리브해 크루즈에 나서고 싶지만 외국어가 모자란다. 어쩌면 이 모든 건 그냥 핑계일지 모른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할 것이다. 이도저도 포기 못하고 엉거주춤 적당히 사는 일상이 오늘도, 내일도 반복된다.
로그인. 게임세계, 새로운 이름의 나는 새로운 존재다. 비탈길을 뛰어 올라간다. 속력을 늦추지 않아도 나의 심장은 일정한 속도로 믿음직스럽게 뛰어준다. 꼭대기까지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정상에 오른다. 마침내 세계가 온전히 나의 발밑에 있을 때 주저않고 뛰어내린다. 눈을 크게 뜨고, 내 주위의 것들을, 그리고 떨어지는 내 자신을 놓치지 않는다. 황홀한 추락은 더이상 치명적인 유혹이 아니다. 여기서는 너무나 매혹적인 순간의 쾌락을 위해 이 세계에서 존재할 권리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 금단의 쾌락을 맛보고도 소멸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보지 못한 것을 게임에서 본다고 말할 때, 흔히 불을 뿜는 용이나 거대 우주 전함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말 게임에서 낚아채야 할 것은, 현실에서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않는 것들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