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윤석호 드라마의 불변의 법칙 [1]

가을, 겨울 그리고 여름, 하지만 윤석호가 어떻게 변하니?

<가을동화>에서 <여름향기>까지, 유석호 드라마에 나타난 불변의 법칙 혹은 콤플렉스

<가을동화> <겨울연가>에 이은 윤석호 PD의 계절시리즈, 그 세 번째인 <여름향기>가 현재 방영 중이다. 국내 시청자들에게 ‘윤석호 PD’는 이제 그 이름만으로 하나의 브랜드임이 분명하며, 제작초기부터 여러 국가 취재진들이 몰려들었을 만큼 범아시아적으로 ‘한류열풍’의 주역임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92년작 <내일은 사랑>부터 2002년 <겨울연가>까지 그의 드라마는 대중으로부터 끊임없는 관심을 받아왔고, 주인공들의 패션은 곧 유행이 되었으며, 전국팔도를 찾아 다니며 헌팅한 아름다운 장소들은 여행상품으로 등장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계절을 달리하며 속속들이 선보이는 윤석호의 드라마는 세월을 역행하고 있다. 지금 채널만 돌리면 옥탑방에 동거하며 생활대사를 내뱉는 현재형의 펄펄뛰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과거 어디쯤에선가 정지된 채 이름 모를 시골을 떠돌며 상실된 첫사랑의 원형을 찾아 헤매이거나, “너의 죄를 사하노라”며 감정과잉의 소꿉놀이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의 드라마에 나타난 불변의 법칙들을, 고착된 콤플렉스들을 짚어본다.

■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당신은 내 운명? _ 첫사랑 혹은 운명 콤플렉스

“우리가 만약 남남이었다면 그랬더라도 우리 서로 알게 됐을까?/ 피… 당연하지, 우린 운명이야, 운명.”(<가을동화>) 태어날 때 산부인과에서 뒤바뀐 기구한 운명도 모자라 <가을동화>의 은서(송혜교)는 오빠인 (결국 친오빠가 아님을 알게 된) 준서(송승헌)와 ‘하늘만 허락한 사랑’에 빠진다. <겨울연가> 역시 마찬가지다. 교통사고 뒤 기억을 잃고 다른 인생을 살아가던 준상(배용준) 역시 그 드넓은 서울 땅에서 하필이면 대학로에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인 유진(최지우)과 우연히 마주치고, <여름향기>의 민우(송승헌) 또한 죽은 여자친구의 심장이 이식된 바로 그 여자, 혜원(손예진)이 산속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찰나, 구세주처럼 등장하게 된다. 이것을 윤석호는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만날 ‘운명’이니까 만난다. 그 어떤 부가적인 설명도 요구되지 않고, 허술한 플롯도 감춰진다. 그리고 운명이란 이름으로 과잉을 허락한다. 그러나 이 윤석호식 ‘운명’에는 양날의 칼이 있으니 바로 ‘운명’으로 점지워진 사랑은 그들에게 첫사랑을 지켜낼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정재 오빠하고 나는 첫사랑이에요. 첫사랑, 민우씨한텐 첫사랑이 그렇게 금방 잊혀지는 존재인 줄 몰라도 우리는 안 그래요.”(<여름향기>) 윤석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모두 첫사랑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임없이 첫사랑의 자리를 채워줄 대용품을 찾도록 운명지워졌다. 그리고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사랑 앞에 “첫사랑에게 미안하니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런 강박에 가까운 관계결벽증은 결국 첫사랑과 비슷한 얼굴 혹은 비슷한 향기를 찾아내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비슷한 건 하나도 없는데… 은혜와 어딘지… 닮았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은혜를 보며 느꼈던 걸 그 여잘 보면서도 느꼈단 거야.…”(<여름향기>) 갑자기 다가온 두 번째 사랑에 당황해하는 민우와 혜원,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들이 결코 서로를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이는 사실 민우만 보면 쿵쾅거리며 반응하는 것은 혜원이 아니라, 그녀에게 이식된 심장이자, ‘기억의 주인’인 은혜(신애)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송승헌과 손예진의 새로운 사랑이지만, 이는 실상 신애와 송승헌의 첫사랑을 향한 강렬하고 끈질긴 회귀인 것이다.

■ 죽거나 혹은 아프거나 _ 이상병리현상 혹은 죽음에 대한 집착

96년작인 <컬러> 중 <화이트> 편, ‘약혼식’날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여인이 죽은 뒤 폐인처럼 살아가던 이창훈이 몇년 뒤 죽은 약혼자와 ‘똑같이 생긴’ 김희선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이 2편짜리 드라마는 그간 윤석호의 드라마가 보여주었던 모든 ‘설정’들의 모체로 볼 수 있다. 여기에 TV문학관 <은비령>에서 보여준 순애보의 ‘정서’까지 가세되며 윤석호 드라마의 원형은 완성된다. 첫 연정을 품은 이영애가 친구의 아내가 되고 미망인이 될 때까지 한결같이 기다리는 남자 이창훈은 “2500년마다 되풀이되는 별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듯 소년의 순정을 버리지 못한 한 프로듀서의 불변의 사랑에 대한 환상은 “한번 뿌리내리면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되어” 그가 만드는 모든 드라마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고귀해야 할 운명적 사랑을 가로막는것은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빠질 수밖에 없는 구렁텅이, 바로 사랑이란 감정의 유효함이다. 하여 이 사랑을 보존하고 완성시키기 위해서, 그 부패의 속도를 영원히 정지시켜버리기 위해서, 드라마는 주인공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렇듯 불가능한 사랑을 완성시키는, 혹은 사랑의 비장미를 더하는 도구로서, 윤석호의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간은 바로 ‘병원’이다. <가을동화>의 은서는 시한부 판정을 받아 앓게 되고 그녀가 죽자 준서도 조용히 은서의 뒤를 따른다. <여름향기>의 은혜는 하필이면 결혼식 날 웨딩드레스를 붉은 피로 적신 채 응급실에서 저 세상으로 떠나가고 “어른이 된 뒤에도 심장이 뛰어준다면…” 하고 바라던 혜원에게 건강한 심장을 이식시켜준다. <겨울연가>의 배용준은 여러모로 기나 긴 고생을 하는 케이스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한번 크리스마스 선물을 들고 약속장소로 나오다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고 (친구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장례식까지 치른다), 그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첫사랑을 알아보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리며, 결국엔 눈까지 먼다.

물론 불치병이나 교통사고 등은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쉽게 채택되는 도구지만 윤석호 드라마에서는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리고 ‘죽음’이나 ‘기억상실증’이라는 이름의 클로르포룸을 부어 사랑의 유통기한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려고, 혹은 영원히 박제시키려고 발버둥친다. 그리고 결국엔 죽음 자체보다는, 이후 살아남게 될 사람이 안게 될 허무하고 비극적 정서에 도취되는 것이다.

■ 정말 “오겡끼데스”하지 않을까? _ <러브레터> 콤플렉스

사실 심장이식을 받은 사람에게 원래 심장 주인의 기억이 옮겨진다는 설정은 그닥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송지나 작가가 99년 선보인 옴니버스드라마 <러브스토리> 중 <기억의 주인>은 도서관 사서인 박상아가 김태우의 죽은 연인의 심장을 이식받으며 그 사랑의 기억마저 이식받는다는, 그래서 그 ‘기억의 주인’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드라마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소재의 유사성보다 더 찝찝함을 안겨주는 것은 <가을동화> <겨울연가>로 이어지며 계속 발견되는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에 대한 너무나도 선명한 기시감이다.

“<소나기> 같은 사랑을 그리고 싶다.” 윤석호 PD가 수차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가을동화>가 상당 부분을 <소나기>의 상황과 정서에 젖줄을 대고 있음은 이미 알려진 바다. 그러나 그의 드라마가 정작 교묘하게 잔영을 퍼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러브레터>다. “참 재밌다… 준상이는 너에 대한 기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난 너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해야 하니….”(<겨울연가>) 교실을 배경으로 한 첫사랑의 장난스럽고도 애틋한 기억,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그의 친구의 연인이 된 여자, 같은 얼굴을 가진 그러나 다른 인격을 가진 주인공의 등장,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는 여자와 반대로 그 기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여자. 이처럼 <겨울연가>는 <러브레터>의 구체적인 설정뿐 아니라 터널에 두 사람이 서 있는 실루엣숏에 이어지는 느릿한 크레인업,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나카야마 미호와 거의 흡사한 짧은 헤어컷을 한 최지우의 프로필숏 등 구체적인 장면까지 비슷하게 재생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설정과 단발적인 그림들은 유사하지만 그 이야기의 본질에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음이다. 그러나 어차피 윤석호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고 아름답게 보여지는 사랑이며, 가슴 아픈 사랑이 아니라 가슴 아프게 보여지는 사랑이다. 그것을 세련되게 숨기기에 그의 세공술은 그리 뛰어나지 못한 것이다.

■ 꿈같은 배경, 그림같은 영상 _ 작위적인 영상에 대한 집착

윤석호 PD를 수식하는 말 중에 가장 흔한 것이 바로 “영상시인, 영상의 마술사”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카메라에 담긴 공간은 내러티브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배경과 이야기의 개연성은 억지스럽다. 그의 드라마에서 배경은 배경, 그 자체가 주인공이다. <여름향기>에서 손예진과 송승헌이 처음 우연히 만나게 되는 덕유산을 비롯, 초록이 눈부신 보성 차밭, <겨울연가>의 남이섬이나 설원의 스키장, <가을동화>의 낭만적인 시골 폐교, 속초 앞바다, 갈대밭 등은 달력에 박힌 아름답고 다양한 계절 그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국의 절경이란 절경은 다 찾아다니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이 드라마의 헌팅팀이 찾아낸 자연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지만 허망하기 그지없고 그 속에 배치된 인물들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추운 겨울 굳이 눈쌓인 스키장 한가운데 주인공들을 세워놓고 얼굴이 얼어붙는 것 같은 표정으로 대사를 이어가게 만드는 잔인한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이야기를 얼개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기보다 그림과 그림을 이어붙인 그림동화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개연성없는 영상은 노래방 배경에 불과하다. 한 다발에 몇 만원을 호가하는 장미를 천장에 주렁주렁 매단다 해도, 죽어가는 연인이 뜬금없이 갈대밭 정중앙에 앉아 대사를 치는 그림은 불협화음으로 다가와 우리의 눈과 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윤석호 드라마의 불변의 법칙 [1]

윤석호 드라마의 불변의 법칙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