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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호 드라마의 불변의 법칙 [2]

■ 그대들의 오지랖, 한강보다 넓구려 _ 필참! 방자와 향단이

“상혁이 니 입으로 유진이 보내준다고 했잖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잖아!!”(<겨울연가>) 자신보다 더욱 남의 일에 팔 걷어붙이고 흥분하는 사람들. 윤석호 드라마엔 늘 예쁘고 잘생긴 주인공들 사이에는 ‘방자와 향단이’ 같은 캐릭터를 심어놓는다. 이들 조연은 대사대비 출연횟수가 지나치게 빈번하며 주인공에 비해 늘 떨어지는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주책스럽거나 수다스럽거나 눈치없다는 스테레오타입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따른다. <겨울연가>에서 박용하와 최지우의 친구로 등장하는 진숙(이혜은)과 용국(류승수)에 이어 <여름향기>의 방자와 향단이는 송승헌의 선배인 대풍(안정훈)과 손예진의 선배인 장미(조은숙)다. 이들은 시퀀스마다 패셔너블한 의상과 나름대로 튀는 설정으로 등장하지만 결국엔 드라마가 한정지운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처리된다.

이들의 역할은 두 가지다. 주인공들을 최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만들 것, 그리고 매 상황을 입으로 중계하듯 보고할 것. 이들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은 고귀한 사랑을 해야 하는 주인공들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혹은 반대로 그 사건을 계기로 사랑을 확인하게 만든다. “아니, 설탕 좋아하는 거나 LP 좋아하는 것 어쩜 혜원이와 우리 민우는 이렇게 공통점이 많을까” 같은 아슬아슬한 대사나 “저건 어쩐지 연인사이 같은 행동이 아닌가” 지문에 가까운 대사까지, 드라마의 부족한 개연성의 틈들은 이들의 대사 몇 마디로 시청자들에게 구체적, 직접적으로 설명되며 메워진다. 이들의 문제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공도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방자와 향단이’들은 삶은 드라마 내부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주인공들에게 큰일이 생겼다는 소식만 들으면 119소방대원보다 KT텔레캅보다 더 빨리 강원도 스키장으로, 서울의 아파트로, 리조트로, 첩첩산중으로 한걸음에 달려온다는 것이다.

■ 빨간실로 묶인 그대 교실에서 만나요 _ 화려한 직업, 그러나 놀이터는 결국 교실

“꽃을 잘 아나봐요? / 직업이 플로리스트거든요/ …플로리스트였어요?”(<여름향기>) 윤석호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겐 모두 그럴듯한 직업이 있다. <프로포즈>에서 류시원은 뮤직비디오 PD였고 김희선은 프리랜서 인형제작가였다. <초대>의 김민은 사진작가고 이영애는 고급호텔에서 일한다. <겨울연가>에서 최지우는 리모델링 디자이너에 배용준은 유학파 건축가다. <여름향기>에서도 송승헌은 이탈리아 유학 중 한국에 들어온 유능한 아트디렉터고, 손예진은 플로리스트다. 송승헌과 같이 이탈리아 유학생이었던 정아(한지혜)는 리조트를 경영하는 오빠(류진)의 회사에서 이벤트 PD로 일한다. 모두들 패션쇼에서 빠져나온 듯 잘 차려입고 파일 하나쯤 들고 공사현장을 여기저기 손짓하며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 이런 클리세들은 민망하게도 매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마치 ‘직업의 세계’를 보는 듯 시즌마다 신종 직업을 소개하는 윤석호의 드라마엔 평범한 갑남을녀는 없다. ‘9 to 5’로 일하는 빡빡한 샐러리맨들에게는 드라마가 일어날 틈이 없는 것이다. 급격한 드라마의 변화 속에 조금씩 꼬리를 감춰가는 트렌디드라마의 마지막 잔재라고 볼 수 있는 이런 특이한 직업 설정은 직업에 기인한 시추에이션 창작이 가장 큰 이유다.

드라마는 이들을 뛰어가면 만날 수 있는 동네로 묶거나(<프로포즈>), 인적이 드문 시골의 호텔이나 폐교에 안착시키거나(<가을동화)>,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 위해 스키장이나 리조트로 밀어넣는다(<겨울연가> <여름향기>). 결국 인물들이 계속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듦으로써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설정은 허술한 얼개를 덮는 허울좋은 방편이자 게으른 창작의 결과다. 또한 이는 윤석호 PD가 여전히 교실이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공간에 모여 있을 수밖에 없는 남녀공학의 고등학교 교실에 대한 판타지, 이 묘한 단체생활에 대한 향수와 동경은, 성숙한 세계로부터 사회화된 현실로부터 등장인물들을 밀어내면서, 세상과 동떨어진 한정된 공간에 고립시키는 것이다.

■ 현실에 눈감은 로맨스 피터팬

대학졸업 뒤 광고회사 프로듀서로 일했던 윤석호의 드라마 PD로서의 ‘입봉작’은 바로 1992년 방영된 <내일은 사랑>이었다. 당시 3대 방송사가 앞다투어 대학생들의 사랑과 생활을 다룬 드라마들을 만들어내던 시절 <우리들의 천국> <열정시대>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왔던 <내일은 사랑>은 이병헌, 고소영이라는 청춘스타를 배출해낸 장이었고 이후 <느낌> 역시 와이셔츠 첫 번째 단추만 잠근 채 펄럭이며 달리던 이정재의 단단한 가슴근육이나 찢어진 청바지의 이본, 새빨간 립스틱의 이지은 등 ‘신세대’로 대표되는 주인공들과 함께 ‘광고 같은’ ‘스타일리시한’이란 수식어를 앞세운 새로운 드라마였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대한민국 드라마는 서서히 변화를 가져왔다. 드라마 역시 세상의 속도만큼 빨라졌고 현실과의 거리도 거의 종잇장에 가까울 만큼 좁혀졌다. 그러나 여전히 윤석호는 경치좋은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놀러오라고, 쉬다가라고 손짓한다. 드라마로 옮겨올 현실의 인물들을 관찰하지 않은 채 그의 머릿속에 만들어진 캐릭터를 여전히 지배하려들고, 개체로서 생명을 불어넣지 않은 채 그들의 입을 빌려 복화술을 시도할 뿐이다. 하여 주인공들은 그가 창조한 큰 설정의 틀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한다. 물론 그의 진심이 다른 곳에 있음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이 부르짖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설득하기에 시청자들은 이미 너무 똑똑해져버렸으며 그의 변함없는 툴은 너무 낡고 진부하다는 것이다.

42%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가을동화>에 이어진 <겨울연가>는 한창 때 25%를 웃돌던 시청률이 후반부로 가서는 19.2%로 떨어졌다. 그리고 9.3%이라는 저조한 1회 시청률로 시작한 <여름향기>의 6회까지 평균시청률 역시 10%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이는 최종회 33.7%의 시청률을 기록한 상대사의 <옥탑방 고양이>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사랑도 변하고, 시청자들의 수준도 변한다. 지난 10년 동안 윤석호의 돌림노래는 계절을 바뀌어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순환되어왔다. 내일은 사랑이라고 외치던 청춘들은 이미 프로포즈를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었으며 순수의 은비령을 넘었다. 가을도 가고 겨울도 가고 여름도 가고 있다. 다가 오는 봄이 오면 그는 또 한편의 달콤한 자기복제품을 만들어 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순수’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미성숙의 상태도, 싱클레어의 알도, 피터팬의 꿈도 이제는 깰 때가 온 것 같다. 백은하 lucie@hani.co.kr

윤석호 PD 1955년생, 1985년 KBS 공채 11기<내일은 사랑> <느낌> <컬러> <웨딩드레스> <프로포즈>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순수> <은비령> <가을동화> <겨울연가> <여름향기>

윤석호 드라마의 불변의 법칙 [1]

윤석호 드라마의 불변의 법칙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