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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3]

<도그빌>에 관한 첫 번째 시선순결의 귀환

그러니까 세상에는 모든 이미지가 사라져도 살아남을 것 같은 영화가 있다. 브레송이 그렇고 고다르가 그렇고 <도그빌>이 바로 그런 영화이다. 라스 폰 트리에가 분필 하나로 만들어낸 세상은 세트를 없애고, 핍진성을 없애고, 스펙터클을 없애고, 교차편집을 없앤다.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창녀에게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장님이 눈을 뜬 것처럼 행세하며, 값싼 유리를 비싸게 만드는 이곳은 인간의 모든 죄의식, 수치, 나약함, 허위, 사기를 모아 만든 유리의 성이다. 그곳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다시 도그마로 귀환한다. 177분 동안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보는 것 같은 단일한 무대 위의 종교적 수난극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와 연극과 소설이 삼위일체로 성큼 다가서는 기적 같은 순간이 다가온다. 히치콕이 우리로 하여금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는 위치 대신 외화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인물로 영화 안에 동참시킨 것처럼 라스 폰 트리에는 우리의 상상력 없이는 절대 채워질 수 없는 또 다른 공간을 <도그빌>의 무대에 심어놓은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에게는 모든 영화가 새로운 시작이었다. 독일 표현주의와 필름 누아르의 매혹을 혼합한 어린이 연쇄살인범 추적극인 <범죄의 요소>는 덴마크판 같은 영화였지만 그는 프리츠 랑의 뒤를 잇는 스릴러의 대가의 자리에서 용케도 비껴 나아갔다. <유로파>에서 컬러 이미지의 표백을 통해 되살아난 기억과 공포의 나선형 계단은 전후 독일을 다시 악몽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 사람들은 초현실적 스릴러라는 수식어로 그의 영화세계를 간신히 갈무리하려들었지만 그런 그들에게 라스 폰 트리에는 초현실적이다 못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공포영화 <킹덤>으로 화답했다. 그건 현실에 대한 음화였고, 덴마크와 유럽 역사의 진혼제였으며, 과거라는 핏빛 벽돌로 건축한 기이한 종합병원의 일지였다. 죽음이 삶의 결손이 아니라 삶의 축적으로 변모하는 곳. <킹덤>의 모든 장소는 역사의 미로이자, 과학적 시선에 복종하게 되는 신체의 한 부분이 되었고, 그것은 미셸 푸코가 갈파한 ‘광기의 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은 모든 위대한 감독들이 그러하듯, 라스 폰 트리에 역시 단 한번도 우리에게 시시한 영화를 제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를 정복해버린 탕아의 미혹이던 종교적 수난극으로 이끄는 욕지기 나는 핸드헬드의 낙원이던, 그는 늘 자신이 겨누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감독이었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뮤지컬이 빚어내는 장르의 기하학을 완전히 부숴버린다. 영화의 무드와 주인공의 정서와 음악적 공연을 내러티브의 맥락 속에서 결합시키는 뮤지컬 자체의 ‘내적 논리’가 깨져나간 것이다. 관객에게는 도전하고 장르에게는 반역하며 역사와 사회 앞에서는 엄격하리만큼 지독한 냉소와 조롱을 흘리는 그의 영화들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도그마란 라스 폰 트리에의 이 모든 도발이 집약된 일종의 구약 성서일 것이다. 그것은 신념이지 도덕이 아니며 (우리 모두 구약성서의 십계명을 완벽히 지켜낼 수 없듯이), 극우든 극좌든 무정부주의든 그 모든 ‘이름’들은 라스 폰 트리에가 붙인 것은 아니다.

<도그빌>에 이르러서, 그는 다시 한번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처럼 챕터를 나누고 소제목을 붙여 관객을 앞질러나간다. 결과를 미리 제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인공의 정서를 1인칭 화자가 앞질러 고지하는 브레히트적 기법을 통해,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목적이 호기심과 서스펜스나 충격 요법이 아닌, 니콜 키드먼의 전락에 대한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2003년 칸영화제에 기자들의 환호와 열렬한 박수가 터져나온 거의 유일한 영화였던 <도그빌>, 데이비드 보위의 <영 아메리카>가 화면을 채우는 마지막을 넋나간 듯 바라보며 나는 ‘라스 폰 트리에’에게 또 당했다는 행복한 놀라움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구속과 금기라는 이름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영화와 끊임없이 혼음난교를 하는 이 백치감독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그빌>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어둠 속의 댄서>와 함께 여성 수난 삼부작을 이룰 것이다. 그 모든 여자들의 수난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없을지라도, 가슴을 턱턱 맞추는 도발과 광기라는 측면에서, 나는 라스 폰 트리에, 그의 이름 외에 금세기에 어떤 감독의 이름도 더이상 알지 못한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도그빌>에 관한 두 번째 시선현란함 뒤, 앙상한 사유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은 낯설고 불편하며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익숙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항간에 떠돌던 소문은 다소 과장된 것이거나 평자들 스스로의 열망을 영화를 통해 다시 비추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혹시 모를 일이다. 베리만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는, 아니 그들의 영화를 오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트리에의 <도그빌>은 어쩌면 구미에 딱 맞는 ‘화끈한’ 디저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저 국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칼 드레이어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얼토당토않은 견강부회만큼은 없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이른바 ‘골든 하트 3부작’-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 그리고 <어둠 속의 댄서>- 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내재적이고 유물론적인 태도로 신파극의 무대를 그 극한으로 밀고 갈 때, 오히려 초월적인 비장함이 텍스트 속으로 더욱 쉽게 스며들 수 있음을 입증한 바 있다. 그 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는 그 모든 것이 마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 양 믿게 만든다. 바로 그 놀라운 마술로 인해 라스 폰 트리에는 우리 시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작가가 되었다.

다시 한번,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종교적인 우화이다. 혹은 구약성서의 익숙한 모티브를 십분 활용한, 심판의 날을 다룬 종교극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다. 여기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태도를 지닌 무시무시한 복수의 신은 로키산맥의 한 작은 마을 도그빌을 향해 감시의 눈을 번득인다. 연극 리허설 무대와도 같은 앙상한 세트를 오가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담은 프레임들은 사물을 투명하게 꿰뚫어보는 ‘신의 시선’을 모방한다(또한 종종 도그빌을 공중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숏’!). 그리고 이제 트리에는 희생의 멜로드라마로부터는 멀찍이 떨어진다.

영화를 보다보면 처음엔 이것이 결국 이른바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에 관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더군다나 수수께끼 같은 이유로 도그빌에 흘러들어온 여인, 니콜 키드먼의 극중배역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은총’(Grace)이다. 자칭 작가(지망생)이자 마을의 얼치기 모럴리스트인 톰에게 그녀는 진정 마을 사람들의 교화를 위해 신이 내려주신 은총처럼 여겨진다. 즉 그에게 그레이스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미하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신의 명을 받아 소돔을 방문했던 두 천사의 화신이었다(라스 폰 트리에 식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결국 ‘엘름가의 악몽’을 만들어낸 프레디 크루거의 화신이 된다). 톰은 자신의 배역을 잘못 선택한 것이거나, 바보가 되어버린 롯에 다름 아니다.

라스 폰 트리에가 <도그빌>을 미국에 관한 삼부작의 첫 번째 영화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이상해 보인다. 그러기엔 이 영화는 지나치게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때로 이 영화는 신의 아들을 모욕하고 거부했던 유대인들을 향한 뿌리깊은 증오와 일맥상통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주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진심이 엿보인다고 느끼게 되는 도그빌에서의 대학살 장면에 이르면 이러한 의혹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것으로 변한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의 천상의 종소리는 그레이스를 옥죄는 도그빌 마을 종탑의 종소리로 ‘내려앉았고’, 이제 <어둠 속의 댄서> 식의 억지스런 비극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순간, 트리에는 정말이지 그보다 더한 악수를 둔다. 거의 베케트의 고도가 무대 위에 진짜 등장한 것과 같은 황당함.

도그빌을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숏’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앙상한 세트는 어쩌면 <유로파>의 스크린 프로세스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그리고 <유로파>의 막스 폰 시도의 내레이션과 <도그빌>에서의 존 허트의 내레이션 사이의 최면적인 유사성). 기술적 (실험이 아닌) 유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라스 폰 트리에는 말 원래의 의미에서 진정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신)라 불릴 만하다. 그런데 그 현란함과 억지 사이를 오가는 권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사유의 앙상함이다. 이것이야말로 라스 폰 트리에가 결코 일급의 작가는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1]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2]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3]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