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이 한통 날아왔다. 혼자 있을 때 열지 않음 옆에 동생들도 있는데 그냥 열어봤다간 그만 희한한 스팸메일에 눈이… 순간 썩고 만다. ㅠ ㅠ 이름으로 봐선 아마도 중학교 때 친구인 것 같다. <씨네21> 보고 학교 친구한테 연락이 온 놈은 이 녀석이 처음이다. 역시 나의 사춘기는 왕따 또는 존재감이 없는 음침한 꺽다리였는지도…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씨네21> 같은 잡지를 보는 노처녀… 음… 말 안 해도 감이 온다. 우린 곧 약속을 하고 버거킹에서 만났다. 사실 난 조금 두근거렸다. 내가 너무 뚱땡이가 되서 못 알아보면 어쩌지? 그녀가 너무 변했으면 어쩌지? 아니면 혹시… 다단계이면 어쩌지? 저 멀리서 그녀가 들어오는데 나의 두려움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중학교 때 보던 그 모습 그대로다.
그녀는 속눈썹이 길어서 기억이 뚜렷이 난다. 키가 큰 나와 걷다가 난 그녀를 본의 아니게 내려다보면 그 긴 속눈썹에 감탄하며 심지어 그 위에 성냥개비를 올려놓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 시절 그녀와 난 음악을 같이 듣는 친구였다. 쉬는 시간엔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귀에 꽂고 있었다. 남들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시간. 새벽 두시에 하는 성시완 프로그램을 들으며 열광을 하고, 퀸의 가사를 번역한다고 브리태니카 영영사전을 찾고, 명동 뒷골목, 중국대사관 골목에서 악보를 사며 기타를 퉁기기도 했던 친구였다. 아마도 음악에 관해 서로 난생처음으로 초절정 잘난 척을 해대던 그 시절. 좋아하는 그룹이 한국에 공연이라도 왔으면 그녀와 난 진정한 빠순이 모드로 학교고 나발이고 공항에서부터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린 빠순이들이었다. 지금도 난 TV나 신문에서 빠순이라고 칭하는 용어를 들으며 뜨끔해진다. “빠순이가 뭐 어때서… 이왕이면 우아한 표현을 써다오… 쳇!” 하면서 말이다.
각트와 하이도의 영화를 부천에서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비록 엉망이라도 각트의 을 듣는다면 기꺼이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정 영화팬과 가수를 좋아하는 팬은 다른가? 아니다.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억눌린 세대인 십대들인 것이다. 그들은 억눌리면서 외롭다. 그래서 함께 공감할 대상과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곤 그 환호성 속에서 ‘아아 나만 힘들지 않구나… 나만 외롭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비단 십대만 가지고 있지 않다. 이제 비극적이지만 외로움과 고달픔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렇게 영화와 음악 뭐가 다른가… 얼마 전 <와일드 클럽>이란 영화를 개봉했을 때 난 정말이지 그녀들, 절대로 늙지 않는 진정한 뱀파이어(?) 골디 혼과 최고로 멋진 여자 수잔 서랜던이 연기하는 미국 빠순이를 진정코 보고 싶어 강남의 작은 극장에서 마지막회를 봤었다. 썰렁한 극장엔 관객이 딱 두명이었다. 도어즈의 노래 <Stoned Immaculate>의 가사 “어느 여름밤 부둣가를 거닐며 마주친 두 소녀. 금발머리 소녀는 자유, 갈색머리 소녀는 모험이라 불렀지”에서 필이 꽂혀 감독은 이 두 여자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현재의 라니비아는 모든 것을 잊고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품위있는 아줌마로, 여기에 아직도 클럽에서 일하며 음악 들으며 사랑에 좌절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으며 살아가는 불안정한 수제트가 찾아와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마치 <천재 유교수의 모험>이란 만화책에서 보면 아직도 공연장을 전전하며 오징어를 팔며 젊은 애들과 공연에 열광하는 할아버지… 도심 한가운데의 단칸방에서 이어폰을 꽂고 사는 할아버지와 유교수와의 만남 같은 대목이다. 거기서 분명 유교수도 그 친구를 질투하지 않던가….
영화와 만화에서는 둘 중 하나라도 성공하거나 가족을 이루고 과거의 기억을 잊고 살지만, 어쩌면 이게 현실적일 수도 있다. 수많은 라니비아는 있을 테지만 수제트는 없을 것이다. 수제트야말로 아주 영화적이고 만화적인 인물이다. 지금 홍익대 앞에서 우줄우줄 내리는 비를 보며 술마시는 우리는 뭐지? 수잔 서랜던도 골디 혼도 아니고… 천재 유 교수도 아니고 그 친구도 아니다. 그날 내 친구와 난 맥주병을 쌓아놓고 마셨다. 그녀는 연구실에 있다가 최근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공계 석사 노처녀의 미래는 암울하단다. 아예 교수는 강남의 성형외과에서 얼굴을 뜯어 고치고 시집을 가든지 외국으로 나가라고 했다니…. 아니 너가 뜯어 고치면 난 죽어야겠네… 쳇. 그러며 아무 말도 없이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나 사실 8월에 캐나다 가.” “공부하려고?” “공부는 무슨… 공부란 명목으로 도망가는 거지지.” 그 녀석 나중에 말한다. “떠나기 때문에 너한테 한번 연락해봤어.” “음, 나도 상상은 했어. 요즘 다들 이렇게 떠나기 전에 연락을 하더라. 예전처럼 다시 만나기 버겁잖아.” 이 뭐냐… 우린 여자 둘이서 마치 연인처럼 대화를 주고받는다… 떠나기 전 이번 주말에도 난 그녀와 만나 줄창 음악을 들을 것이다. 음… 퀸의 음악도 들어줄 테다. 요즘 TV 쇼 시그널에도 나오더라. 그 <돈트 스톱 미 나우>가. 친구야… 이번 토요일… 죽도록 마셔주마. 김정영/ 프로듀서 sicksadworld@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