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하기 힘든 어둠을 본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변하게 된다. 술이나 마약으로 도망치거나, 감정을 숨긴 채 냉정해지거나, 악마의 유혹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전세계가 말려든 전쟁, 군인보다 민간인 사상자가 많았던 전쟁, 인간이라는 종의 극한까지 봐버린 사람들은 어둠으로 빠져들게 된다. 필름 누아르도 그런 사람들의 도피처였다.
41년에 등장한 존 휴스턴의 <말타의 매>는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의 시작이라고 평가된다. <말타의 매>에는 모든 음모의 중심에 서 있는 ‘팜므파탈’, 차가운 도시의 풍경과 극단적인 명암의 조명, 미디엄 숏의 빈번한 활용, 비관적인 세계관 등 필름 누아르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또한 원작인 대시얼 해밋의 소설이 가지고 있던 하드 보일드적인 차가움까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필름 누아르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당연히 <말타의 매>를 먼저 봐야 한다.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험프리 보가트)는 윈덜리라는 여성에게 사건 의뢰를 받는다. 동생과 함께 도망친 더스비란 남자를 미행하여 소재를 알려달라는 것이다. 샘의 파트너인 아처가 더스비를 미행하던 중 살해당하고, 몇 시간 뒤 더스비 역시 살해당한다. 모든 것이 거짓말임을 안 샘이 추궁하자, 윈덜리는 자신의 이름이 브리짓 샤네시이며 악당들에게 쫓기고 있음을 털어놓는다. 한편 카이로란 남자가 샘을 찾아와 검은 매의 조각상을 가져오면 5천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모든 음모의 중심에는 템플 기사단이 만들었던, 보석으로 뒤덮인 매의 조각상이 있었던 것이다. <말타의 매>에서 중요한 일은 모두 방 안에서 벌어진다. 그들은 그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처럼, 언제나 다시 방으로 돌아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거나 고백한다. 그들은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미로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조금씩 반복되면서 무언가 변화하고 마침내 파국을 맞는 광경이 <말타의 매>에는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하드 보일드,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들은 대개 사립탐정이다. 그들은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고, 경찰과 악당 양쪽과 싸워가는 고독한 늑대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영리한 두뇌와 강한 완력.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당장에라도 생매장되거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들은 반드시 강해져야만 한다. 감정을 버려야 한다. 차갑게, 오로지 자신의 목적만을 위하여 나아가야 한다.
아처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으면서 샘 스페이드는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로, “아처가 죽었다고?” 되묻는다. 비서에게 아처의 죽음을 알릴 때도 마찬가지다. 아처가 죽은 날 사무실에 들른 샘은 비서에게 창문의 ‘스페이드 앤 아처’란 문구에서 아처를 지우고 샘 스페이드로 바꾸라고 지시한다. 샤네시와 몇번의 키스를 나누면서도, 샘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사실’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샤네시에게 진실을 들은 뒤 샘은 말한다. “혹시 20년형을 받게 되면 나에게 돌아와. 그때까지는 기다려주겠어… 목을 매달게 되더라도 항상 기억하겠어”라고.
샘 스페이드는 정말 냉혹하다. 냉혹하기로 따지면 필립 말로우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게는 어딘가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기운이 서려 있다. 폭력으로 따지자면 마이크 해머가 앞서지만, 그는 단순한 정의파다. ‘범죄자를 잡으려면 교활해져야 한다’라는 대시얼 해밋의 지론을 실천하는 샘 스페이드는 모든 것을 범죄의 해결에만 이용한다. <말타의 매>에서는 샘 스페이드의 교활한 웃음을 자주 볼 수 있다. 그것은 주로 샘이 경찰이나 악당들을 즉흥 연기로 속인 뒤의 모습이다.
샘은 범인을 잡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이용한다. 그에게는 어떤 회한도, 정의감도 없다. 단지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것뿐이다. 샘은 서부극의 보안관이나 카우보이 같은 영웅이 아니다. 악당을 해치우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 따위는, 결코 샘 스페이드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범인을 잡아도 세상의 어둠은 걷히지 않는다. 샘 스페이드가 살아가는 곳은 여전히 ‘다크 시티’이고, 수많은 악당과 ‘팜므파탈’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다. 그들을 일일이 미워하거나, 사랑에 빠진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가 냉혹해진 것은, 아주 단순한 생존의 선택일 뿐이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a@hanmail.net
The Maltese Falcon, 1941년 감독 존 휴스턴 출연 험프리 보가트, 메리 아스터 화면포맷 스탠더드 오디오 돌비디지털 2.0 출시사 씨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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