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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감독들 [3]

<싸이퍼> 감독 빈센조 나탈리

폐허같은 세상에 탈출구를 뚫다

한 작가의 영화세계를 한 단어로 간추린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지만, 빈센조 나탈리(34) 감독의 작품은 공히 ‘탈출’이란 말을 떠오르게 한다. <큐브>의 시동을 걸기 위한 ‘워밍업’이라 할 만한 30분짜리 단편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세명의 이야기이고, 고작 15만달러로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든 SF 영상을 보여준 <큐브>(1997)는 영문도 모른 채 갇힌 6명이 정육면체의 살상 공간에서 탈출하는 이야기였으며, 부천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초청받은 <싸이퍼>(2002)는 기억과 신분을 세뇌시켜 이중스파이로 써먹다가 낌새가 이상하면 언제든지 제거해버리는 기업들의 냉혹한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는 스파이물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싸이퍼>와 거의 동시에 만든 <낫씽>(Nothing, 2002)에선 “룸메이트인 두명의 루저(패배자)가 폐허처럼 된 세상에서 난처한 상황을 헤쳐가는 이상한 코미디”다.

<큐브>의 성공, 그러나…

빈센조 나탈리는 그의 영화처럼 매력 넘치는 매끈한 외모를 갖췄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영화처럼 기묘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일단 그는 “너무나 평화롭고 안전해 재미가 없는 캐나다보다는 아르헨티나나 한국 같은 흥미진진한 곳에서 살고 싶다”면서도 웬만해선 토론토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늘 그곳에서 만들었고, 앞으로도 어렸을 적부터 영화 만들기 ‘놀이’를 함께하며 성장한 친구들과 계속 토론토에서 영화를 만들 생각이다. 물론 그는 놀라운 장편 데뷔작 <큐브> 이후 국외에서 호출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도, 할리우드에서도 감독 제의를 받았지만 사양했고, 단지 국외의 자본을 힘겹게 수혈받아 무려 5년 만에 두 번째 작품을 내놨다.

<큐브> 이후, 할리우드의 독립영화사라 할 만한 ‘라이온스 게이트 필름’이 <큐브2>의 감독을 제의했지만 “이미 큐브에 충분한 시간을 썼다”며 거절하고 대신 2천만달러짜리 프로젝트 <접합>(Splice)에 몰두했다. 두명의 유전공학자가 다른 종의 동물 유전자를 섞어 새로운 생물을 만드는 <프랑켄슈타인>류의 영화였고(컴퓨터를 좋아하고 과학에 관심 많은 성향이 그를 자꾸 SF장르에 몰두하게 한다), 나탈리는 “2천만달러 규모이긴 하지만 그 효과는 4천만달러짜리를 능가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할리우드는 그의 영화적 취향을 B급 SF 수준으로 간주해버렸고, 그에 ‘걸맞은’ 값싼 시나리오만 잔뜩 들이댔다. “할리우드에서 일해볼 요량은 있으나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걸 확인했다. 할리우드는 돈을 너무 노골적으로 밝히고 구체적으로 아주 자세한 조건을 달아 요구사항을 내미는데 그 내용들이 괴팍스런 내 영화 취향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탈리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과 캐나다의 시민권을 다 갖고 있다.

그가 호사스러워서 별나게 군 건 아니다. 캐나다의 “가혹한 배급 시스템” 때문에 그의 계획은 계속 지연됐다. 정부보조금이 오히려 혹이 됐다. 캐나다의 배급사들은 정부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안전한 거래만을 했고, <큐브> 같은 ‘작은 영화’의 배급에 최소한의 성의만 보였다. <큐브>가 프랑스와 일본에서 각각 600만달러, 400만달러를 벌어들일 때 자국에서의 수입은 미미했다. 캐나다 안에서 제작비를 조달하는 건 사실상 포기한 듯 보인다. <싸이퍼>와 <낫씽>은 모두 영화 견본시에서 사전판매 형식으로 해외에 배급권을 팔아 제작비를 마련했다. “유럽에선 프랑스와 독일이, 아시아에선 일본과 한국이 투자를 해줬다. 이번 부천영화제에 초청받아 처음 한국을 찾은 것도 즐겁지만 그래서 더욱 한국에 애착이 간다.”

그의 야심찬 프로젝트 <접합>은 완성을 기약할 수 없다고 한다. 유전자 조작 같은 유전공학이 날로 발전하는 현실도 작품 주제를 어디로 끌고가야 할지 곤란하게 만든다며 이런 식이라면 다큐멘터리가 될 것 같다고 유쾌하게 웃어버린다. 그가 농담을 하면서 웃을 때는 딱 10대 후반의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다. 두 번째 영화가 왜 이렇게 늦어졌느냐는 질문에 “스탠리 큐브릭을 따라하느라고 그랬다”고 말해놓고는 “고약한 유머”라고 손사래를 치며 웃을 때도 그랬다.

“삶이 단조로우니까 영화 만들지”

<큐브>에서 끝내 탈출에 성공하는 건 가장 위태로워 보였던 자폐아였고, <싸이퍼>의 주인공은 “프란츠 카프카가 쓴 제임스 본드로, 정신분열증에 걸린 007”이다. <낫씽>의 두 주인공은 사회의 ‘낙오자’다. 모든 영화가 그런 건 아니지만 간혹 도대체 이걸 만든 감독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난 학교를 정말 증오했다. 강압적으로 뭘 시키는 게 아주 싫다. 그렇지만 내 삶 자체는 단조롭고 지루하다. 아마 이런 면이 영화에 반영됐을 것이고, 내 인생의 단조로움에 대한 방증이 영화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이건 ‘감독스러운’ 대답이다. 감독스러운 건 또 있다. 그는 11살 때 <스타워즈>를 본 뒤 8mm카메라를 들고 줄기차게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영화와 함께 벗해온 게 만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들이나 그들이 사는 세상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렸을 때는 만화에 빠졌는데 내 영화의 캐릭터들이 반영웅인 게 그 영향일 거다. 슈퍼맨처럼 별다른 갈등없는 완벽한 영웅에겐 별 매력을 못 느꼈다. 스파이더 맨처럼 실수도 하고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캐릭터가 좋다. 그게 훨씬 현실적이지 않나. 사람은 선택을 해야하고 그 선택은 불완전해서 거기서 어떤 혼돈이 생겨난다. 내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웃음)

요즘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그가 사랑하는 만화의 반영웅들을 싹쓸이하는 경향이 있어 짜증스러워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이나 리안의 <헐크> 같은 영화는 정말 좋다. 감독들을 존경해왔기도 하고. <헐크>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어땠나?”(관객 반응은 ‘별로’라는 대답을 듣고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탈리가 토론토를 굳이 ‘탈출’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친구들에게 있을 것이다. 배우와 시나리오 작가를 포함해 상당수 스탭이 그의 오랜 친구들이다. <싸이퍼>에서 “정신분열증에 걸린 듯한 007”이 선웨이시스템이라는 기업의 지하 탱크에 들어가 회사의 중요 정보를 빼내오는 장면이 있다. 지하요새 같은 그곳에서 주인공이 좀 괴짜 같은 관리자를 만나 한판 대결을 벌이는데 그 관리자가 데이비드 휼렛이란 나탈리의 고등학교 친구다. 이 친구는 단편은 물론 <큐브>에도 출연한 적이 있고, <낫씽>에서는 주연을 맡았다. <낫씽>에 데이비드 휼렛과 나란히 주연을 맡은 앤드루 밀러 역시 친구다. <낫씽>의 작품 아이디어는 나탈리가 냈지만 시나리오 작업은 앤드루 밀러가 맡았다(<싸이퍼>의 007 제레미 노담은 나탈리가 평소 좋아했던 배우이고 본드걸 역의 루시 리우는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하고 싶다며 직접 찾아왔다).

750만달러짜리 시리즈라면 할리우드 제품의 10%에도 훨씬 못 미치는 예산을 쓴 셈이다. 그런데 카프카식 실존주의 고민이 담긴 <싸이퍼>는 스파이 장르의 현대식 위용을 제법 잘 갖췄다. “로케이션이 많았는데 건물 대부분은 토론토의 정부 청사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게 정부 건축물들일 것이다.” 토론토의 한 창고에서 찍은 <큐브>에서 돋보이는 게 정육면체의 큐브 디자인이었다. <싸이퍼>에서 서로 경쟁하는 두 기업 디지콥과 선웨이시스템의 내부 디자인도 인상적이다. 디지콥은 전형적이고 보수적이어서 각을 줬고, 선웨이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모던해서 원형으로 디자인 컨셉을 잡았다고 한다.

마지막 화제는 ‘캐나다 감독들’이었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는 나와 취향은 다르지만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준 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다. 그러고보니 캐나다 감독들은 다 괴짜네. 나도 그렇고.” 글 이성욱 lewook@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부천에 온 그의 영화, 폐막작 <싸이퍼>정신분열증에 걸린 007

권태로운 평범함에 젖어사는 모건 설리반은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라는 아내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기업 디지콥의 스파이로 이중생활에 들어간다. 잭 서스비라는 가명으로 미국 전역의 무역회의를 돌며 정보를 전송하던 모건은, 리타라는 여인으로부터 첩보업무는 눈속임일 뿐이고 정작 조작되고 있는 것은 당신의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말을 듣는다. 리타가 준 각성제로 기억을 보존한 모건은 선웨이라는 또 다른 대기업에 고용돼 역으로 디지콥의 정보를 캐내는 이중 산업스파이 노릇을 하게 되면서 혼란에 빠져든다. 이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미궁에 빠진다. ‘싸이퍼’란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 사물이나 인간을 뜻하는 단어. 시리즈의 반복되는 결말을 차용하고 히치콕식 화법이 등장하는 <싸이퍼>는 스타일 넘치는 촬영과 <큐브>를 잇는 메커닉디자인 감각이 빛난다.

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감독들 [1]

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감독들 [2]

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감독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