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식모>(1968)가 흥행을 하고 나서
한참 뒤의 일이다. <서울의 지붕밑>(1961)으로 데뷔하여 <말띠 여대생>(1963), <소문난 여자>(1966)
등으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던 이형표 감독이 나를 찾았다. <남자식모>의 리메이크건(件) 때문이었다. 원작자인 임화에게서 이미
허락받은 상태여서 나 역시 반대할 이유는 없었으나 몇 가지 단서 조항을 달기로 했다. 먼저 영화 속에 쓰인 나만의 독특한 기법을 다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두 번째로 감독협회에 50만원을 기부하는 조건이었다. 나만의 독특한 영화적 기법이란 서브타이틀을 야채로 표시한 것인데 지금은
종종 재미있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 방식이 당시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당근이나 배추, 양파 등으로 등장하는 직함과 이름을
보며 관객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했고,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단박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남자식모>를 관객의
뇌리에 뚜렷이 각인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한 원작이 가지는 독특한 매력을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름의 원칙을 정한 것이다.
석쇠 위에 올려진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되는 장면 또한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종의 나만의 웃음철학이자 작가적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심우섭만의 ‘웃기는 방식이자 이야기’인 셈인데, 나만의 스토리텔링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형표는 위의 조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대가로 <남자가정부>(1979)를 성공적으로 제작, 흥행시킬
수 있었다. 10년 만에 발표되는 리메이크작은 마치 가수에게 헌정음반과 같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요즘 곳곳에서 ‘엽기’의 열풍이 부는 걸 보면서,
문득 나야말로 그 시대에 ‘엽기 감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기존의 틀을 깨는 파격적 형식의 과감한 도입은 어찌보면 내가 코미디영화 감독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럴 땐 스스로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남자식모>가 웃기는 방식에 대한 스스로의
철학이 부화되기 시작한 영화였다면, <남자 미용사>(1968)는 영화의 미래지향성을 제시해 본 영화였다. 단지 그 자리에 놓인
형식을 깨뜨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영화가 가진 특성을 이용해 미래를 예견하고 신선한 발상을 통해 관객의 사고의 폭을 넓혀주자는
생각이 치민 것이다. 따라서 <남자 미용사>에서는 예전에 볼 수 없던 헤어스타일을 대거 등장시켜 볼거리를 제공했다. 탑처럼 높게
쌓아올린 머리 스타일을 하고서 명동거리부터 광화문까지 걷던 모델을 보면서 당시 관객이 느꼈을 이질감은 엄청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때
연출했던 헤어스타일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남모를 즐거움이기도 하다. 항상 한발씩 앞서가는 나의 연출방식이
과연 관객의 취향과 일치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고정된 관념을 깨나가는 것은 어쨌든 나에게 숙명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남자 시리즈’의 유행이 한풀 수그러들자, ‘팔푼이
시리즈’를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팔푼이’는 유행하던 만화 캐릭터에서 따온 이름이었으며, 덜렁대지만 귀여운
캐릭터의 성격을 며느리나 사위 등에 대입해 웃음을 유발하자는 것이 기획자의 의도였다. <팔푼이 며느리>(1968)를 시작으로 <팔푼이
사위>(1968), <팔푼이 부부>(1969)까지 세편을 연달아 만들었다. <팔푼이 며느리>의 시나리오는 <즐거운
청춘>(1968)의 녹음기사였던 김경일(본명 강대성·기술협회 녹음위원회 회장)이 맡았다. 현역 녹음기사 중 가장 귀가 밝아 소리를 구분하는
데 귀신이라 불리는 그였다. 그는 시나리오에서 서민적이고 친근한 며느리상을 제시하면서 웃음의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솜씨를 발휘한다. 부잣집에
시집온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컵을 부셔(부시다- 씻다)오라고 하자 진짜로 부숴(부수다- 깨뜨리다)오는가 하면, 술을 대령시키자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로 맥주를 따뜻하게 덥혀서 드린다든가 하는 요절복통 실수연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제작사인 세기상사는 엄청난 돈을 거머쥐게
된다. ‘팔푼이 시리즈’가 차례로 흥행하고 마지막으로 손을 댄 시리물은 ‘팔도 시리즈’였다. <팔도강산>이 TV드라마로 인기를 끌던
때라 거기서 ‘팔도’를 빌려 <팔도 노랭이>(1970), <팔도 며느리>(1970), <팔도 주방장>(1987)을
만들게 된다. 우연의 일치인 양, 손을 대는 시리즈물마다 꼭 3편씩만 만들었다. <팔도 주방장>은 시리즈물의 마지막이기도 했으며,
내 영화이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구술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 <남자와 기생> <팔도며느리>
등 다수 연출
정리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