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나 역시 조금은 아쉬웠다. 그 아쉬움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이다. 용수철은 분명 탄력을 머금고 더 튀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수시로 화면을 스치는 아름다운 장면들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이 ‘영화 전체’의 힘에 의해 더욱 탄력을 받아 튀어올라야 한다. ‘영화 전체’의 힘. 그것이 가장 힘있는 도약대다.
음악 역시 그 중요한 도약대다. 음악은 사람들을, 캐릭터를 밀어올린다. 음악감독 원일은 그 힘을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음악가 중 하나이다. 그는 정통 국악인이면서도 국악 바깥의 음악적 전통에 개방적인 새 세대의 선두주자라고나 할까. 그는 틀림없이 체계적인 국악 교육을 받아 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전통적인 국악인과는 다르다. 물론 국악과 다른 음악의 퓨전을 모색하는 음악가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과 원일이 다른 점은, 원일의 귀가 진보적인 대중음악의 다양한 대안들에 좀더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국악과 재즈와의 접목, 뭐 이런 단어들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퓨전은 이것과 저것의 단순한 접속이 아니라 문제의식의 충돌과 융합과정이어야 하는데, 원일의 음악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원일의 창작욕은 대단하다. 그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사람처럼, 모든 음악을 경계선 안으로 들여놓고 끊임없이 그것들을 먹어치우며 음악적 허기를 채운다. 그와 같은 허기를 달래주는 중요한 장르가 영화음악이라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어쩌면 한국의 영화음악계는 그처럼 다양한 전통의 음악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더풀 데이즈>의 음악에서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는 다양한 요소들을 무리없이 잘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서양 화성학을 밑에 둔 관현악 편곡을 체코 프라하에서 80인조 오케스트라를 통해 살려냄으로써 웅장함과 음악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운드의 첨단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찾아 헤매는 사운드 모색가로서 미래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성공하고 있다. 동시에 그의 전공인 국악적인 뉘앙스를 보일 듯 말 듯 살림으로써 그 안에 독특한 색채를 가미한다. 동시에 대중적인 ‘노래 패턴’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대중적 이해도 역시 높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혼융을 이뤄내는 데 그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이 영화를 통해 확인된 대로, 아직은, 충분한 가능성을 품고 모색하는 단계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이 영화가 스스로 품고 있는 탄력을 충분히 다 발휘하면서 도약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더 화려하게 튀어오를 생각을 접고 더 디스토피아적으로, 조용하고 암울하게 가라앉았어야 했나. 음악도, 혹시 마르 지역의 암울함은 더 적극적으로 암울하게 그려냈어야 했나. 죽을 각오를 하고 가라앉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원더풀 데이즈>는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애니메이션의 기념비적인 성취의 지점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만큼 온 김에 더 앞으로 가보자.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