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다는 것은 참 일반적이고도 특별한 문화생활이다. 추석이나 설날 큰맘먹고 찾아가 명절 특선 개봉작을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함께 보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이다. 조금 마음의 여유가 있는 퇴근길에 비디오 가게에 들러 빌려오는 한편의 비디오는 일상적이다. 성인에로 비디오부터 실험예술영화까지 그 포용력의 넓이는 대양과도 같다. 어떤 다른 예술 장르가 이토록 친절하고 열심이며 물심양면으로 풍부하던가. 영화가 시작-play되면 우리의 삶은 일시정지 -pause된다.
한 시간 반 동안 삶의 일시정지. 어쩐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렇다. 가령 음악을 듣는 것은 삶이 흐르는 동안 음악이 배경으로 더해지는 것 같고, 책을 읽는 것은 무얼 먹는 것, 혹은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생활의 한 부분 같아서 모두 삶의 흐름 속에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는 내 삶은 잠시 멈추고, 따라서 현실도 잠시 멈추어 있을 것 같고, 영화 속 세상으로 여행을 가는 것 같다. 말하자면 타임머신을 타는 것처럼 말이다.
알프레도와 토토만큼은 아니어도 누구나 영화에 대해 추억과 낭만을 가지고 있다. ‘국민학교’ 시절에 이소룡 영화를 영화보다 더 리얼하게 구연(口演)하던 녀석이 아직도 생각나는가 하면 을 혼자 처음 봤을 때 너무 놀라서 모르는 옆사람에게 어버버 으갸갸 뭐라고뭐라고 막 지껄였다가 이상한 바보놈이 된 기억과 나도 한창 자라던 나이에 좋아하던 여자애랑 얼떨결에 <그로잉 업>을 보고 웃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 시절 곧고 바르게 그로잉 업 해야 할 전국의 청소년들은 <취권>의 열풍에 모두 술주정뱅이처럼 흐느적흐느적 갈지자로 걸었던 기억이 난다.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인생의 좌표에 잠시잠시 쉬어가는 정거장처럼 점점이 영화들이 있었다. 그 점들은 별자리 사이사이 포진한 블랙홀이다. 시간마저 빨아들이는 블랙홀.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다른 공간, 다른 시간 속에 있었고 현실의 시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잊혀져도 마땅했을 만큼 영화는 강한 힘이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 위에서 보내다가 때때로 극장이라는 black hall에 들어가 영화라는 black hole에 기꺼이 빠져들어 시공간 여행을 만끽했다. 극장은, 참 멋진 공간이다. 영화의 힘은 극장이라는 특별한 스케일의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민간인이 제 멋대로 드나 들 수 있는 건물 중에 그보다 더 큰 스케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극장은 특별하면서도 아무나 드나드니 일반적인 공간이다. 두툼한 이중 방음문은 현실세계를 단호하게 차단해주고 별이 하나도 없는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는 듯 거리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던 높디높은 천장과 세상을 다 비춰줄 것 같은 넓디넓은 은막은 괜히 숨을 크게 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극장 특유의 냄새. 그 공기와 공명. 낡은 접이식 의자. 운좋게 2층 첫째 줄 자리라도 배정받으면 특권층이 된 듯한 기분. 토토에게는 시네마파라다이소극장이, 우리 동네는 삼원극장이. 그리고 언제나 설레던 시내 유명 극장들. 대한극장. 피카디리와 단성사. 허리우드 극장. 아세아극장. 국도극장. 그리고 명작 재개봉의 원조 푸른극장. 아아, 그리고 한국 미술사에 한 페이지를 할애해도 마땅할 국제극장의 그 간판을 그린 분은 어느 화백이시던가.
그러나 말짱 지나간 이야기다. 지금의 극장은 우아하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멀티플렉스라는 복합상영관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극장의 장엄한 기품과 권위를 토막내 좀 큰 비디오방으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입을 딱 벌어지게 했던 극장화면은 지금은 필름인지 DVD를 트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웅장한 극장이 없으니 우아한 영화도 없다. 큰 무대가 없으면 공연예술이 발전할 수 없듯이 큰 극장이 없으면 영화도 퇴화한다. 그래서 영화는 점점 천박해지고 굳이 극장까지 가서 봐야 할 영화도 드물다. 인터넷을 통해 공짜로 다운받았다는 것말고는 경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 divx동영상 따위나 PC로 재생시켜 보거나 성냥갑만한 휴대폰 화면으로 영화를 보겠다는 시도가 오늘 우리의 시네마천국인가. 다채롭지만 경망스럽다. 어쩐지 검(劒)을 맥가이버 칼로 바꾼 기분이다.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kongtem@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