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영화가 그렇게도 좋았노라고, 그래서 연기를 배우려고 동양극장에 연습생으로 들어갔노라고 한은진 선생은 말했다. 3년 전 <여성영화인사전>의 집필을 위해 선생을 찾아뵈었을 때였다. 동양극장 청춘좌에서 연습생 시절을 보내고 동아일보사 연극경연대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1939년에 선생은 영화에 첫발을 디뎠다. <무정>(박기채)의 영채 역이었다. 당시 원작자 춘원은 선생의 연기를 이렇게 평했다. “이번이 데뷔라는 한은진 양이 이 과백(科白)도 동작도 없는 영채의 역으로 그만큼 관중의 주의를 끝까지 끌고가는 성의와 역량은 큰 장래를 약속하는 것 같사와 기쁨을 금치 못하나이다.”(이광수, 「영화 <무정>으로 공개장, 감독 박기채씨에게 보내는 글」, 『삼천리』 제11권 제7호, 1939년 6월)
엄격한 시어머니나 “어마어마한 대비마마”, 아니면 대갓집 마님의 이미지를 주로 선보였던 신필림 시절의 이미지에 묻혀 젊고 아름다운 여성 스타로서의 선생의 면모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1930, 40년대에 선생은 문예봉, 김소영, 차홍녀, 지경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여성 스타였고 의상 모델로 신문지상을 장식하거나 라디오드라마(<연애와 결혼>(김파랑 작, 1938))를 낭독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지금의 우리가 로맨스의 여주인공으로서 선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로는 <무영탑>(신상옥, 1957)이 남아 있다. 탑을 만들러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호수에 몸을 던지는 서글픈 아내 한은진은, 위엄이 넘치는 <씨받이>(임권택 감독, 1986)의 노마님을 압도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 요즘 관객에게는 어쩐지 낯설다.
선생의 익숙한 이미지는 문화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에서 시작되었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에서 굳어졌다. 목숨을 걸고 아군병사를 구하는 심지 굳은 어머니였던 <불사조의 언덕> 이후, 선생은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선생이 구현했던 어머니는 자애롭고 고운 어머니 김신재나 심술맞은 시어머니 석금성, 친근하고 너그러운 친정어머니 황정순과 달리 “봉건적인 완고한 도덕관념에 사로잡힌” 하지만 “어덴지 휴매니즘이 깃들어 있는 듯도 한”(최은희, 「후배양성에 전념하는 한은진 여사」, 『국제영화』 1963. 3.) 그런 것이었다. 청상과부를 며느리로 둔 시어머니였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처럼 선생은 말하자면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 선, 60년대 여주인공을 얽어매는 엄격한 전통을 표상했다. 선생의 어머니상은 보수적이지만 그 안에 “휴매니즘”을 담고 있으며 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말하자면 선생의 어머니는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우리 것 또는 근원으로서 다가온다.
영화배우로서 선생의 마지막 모습은 임권택 감독의 <축제>(1996)에 남아 있다. 자손들에게 “나이를 나눠주고” 그만큼 나이를 잃어가던, 마침내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할머니 역할이었다. 그 영화에서도 유독, 갓 시집온 새색시가 되어 색동저고리 차림에 보퉁이를 가슴에 안고 남도의 바닷가에 서 있던 선생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순진/ 영화사 연구자·도서출판 소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