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이 되살아왔다. 지난 6월 말 나란히 첫 전파를 탄 한국방송의 <인물 현대사>와 <미디어 포커스>는 87년 6월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이고, 반성문이다. 제1텔레비전의 <인물 현대사>가 민주화운동 열사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으로, 제2텔레비전의 <미디어 포커스>는 독재권력에 부역했던 방송사의 고해성사로 첫 포문을 열었다. 내게 이 두 프로그램은 지난 대선을 통해 주류 권력을 장악한 386세대 혹은 민주화운동 세력이 마침내 방송까지 접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읽혔다.
자고로 권력을 얻으면 역사를 고쳐쓰고 싶게 마련이다. <인물 현대사>에는 역사를 다시 쓰고 싶어하는 386세대의 욕망이 녹아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물 현대사>는 영상으로 ‘다시 쓰는 한국 현대 인물사’이다. <인물 현대사>가 그 첫머리에 민주화운동의 주력부대였던 대학생의 어머니(어머니의 이름으로, 배은심 편), 노동의 새벽을 열어젖힌 청년 노동자(꺼지지 않는 불꽃, 전태일 편), 도청을 사수한 5월 광주의 시민군(산자여 따르라, 윤상원 편)을 끌어들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87년의 적자를 자임하는 386세대들은 핏빛 광주와 청계천의 불꽃이 자신들의 것임을 선포한다.
<인물 현대사>는 여전히 ‘뜨거운’ 이름들을 다루지만 뜨거운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어두운 골방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던 ‘광주 비디오’의 충격도, 누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밀려오던 <전태일 평전>의 감동도 찾기 힘들다. 세월의 풍화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실망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새 익숙해진 피흘리는 이한열, 불타는 전태일 열사의 자료사진만이 재방송될 뿐이다. <인물 현대사> ‘열사 3부작’의 구성이 88년 방송된 <오월의 노래>에서 그다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탓이다.
<인물 현대사>는 세월에 깎여나간 뜨거움을 오늘의 차가운 반성으로 채우지 못한다. 거리의 영광과 노동의 추억에 대부분의 시간이 바쳐질 뿐 오늘, 여기의 시선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인물 현대사>는 6·29선언 바로 다음날의 시선에서 멈춰선다. 90년대 이후 이한열, 전태일, 윤상원의 유산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벌어졌던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진영의 해석 투쟁은 ‘생략’돼 있다. 그저 과거에 대한 부채의식을 다시 불러들이고, 87년의 요구가 ‘완성’되었다고 선언하기에 급급하다. 87년 이후 거리투쟁에 대한 기록이라 할 만한 ‘어머니의 이름으로, 배은심 편’은 91년 투쟁 이후의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의 분열과 갈등을 다루지 않는다. ‘꺼지지 않는 불꽃, 전태일 편’도 한국 노동계급의 오늘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전태일 정신이 오늘의 노동운동에 끼치고 있는 영향에 침묵한다.
이는 87년 거리에서 멈추고 싶어하는 이들의 심리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 거리에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는 돌아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밑천으로 금배지를 향해 달려간 이들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이제는 정치인이 된 당시 총학생회장의 감상적인 회상만이 상투적으로 배치될 뿐이다.
<인물 현대사>의 첫 방송 다음날 전파를 탄 <미디어 포커스>의 첫 번째 편 ‘KBS, KBS를 말한다’는 권력에 부역해온 스스로에 대한 자아비판이었고, 전향문서였다. 한국방송의 반성문은 화끈했다. 스스로 낯 뜨거운 땡전뉴스의 기억을 되살렸고, 빨갱이 사냥의 죄과도 들추었다. 독재권력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부르고도 민주화 이후에도 승승장구한 “KBS인들”의 얼굴까지 까발렸다. 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에서 자유로운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으나 국민의 정부에서조차 환골탈태하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미디어 포커스>는 본격적인 방송비평 프로그램의 형식으로 진행된 두 번째 방송에서도 신문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방송 보도의 문제점에 대해 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방송의 반성문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는 판단유보다. 나는 아직도 어느 날 낯 간지럽게 안면 바꾼 ‘진보방송’의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또한 방송사의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이 ‘미디어간의 상호견제와 비판’을 내세우면서도 사실상 조중동 ‘때리기’에 집중하는 것도 또 다른 권력 쌓기가 아닌지 미심쩍다. <조선일보>는 우리 모두에게 면죄부를 발부해주는 전지전능한 악당이 아니다. 지난 대선 <조선일보>의 패배는 수구언론의 패배이기도 하지만 신문매체의 패배이기도 했다.
이제 방송은 조중동보다 더 큰 권력이다. 더구나 방송은 간단한 반성문으로 과거에 대한 면제부까지 손에 쥐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스스로 움켜쥔 권력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다. 반성없는 권력은 권력에 대한 허무주의만 유포할 뿐이다. 자꾸 경상도 아주머니인 우리 어머니가 “그놈이 그놈이다”라고 말할 때마다 대꾸할 말이 없어진다. 쉽게 쓰여진 반성문도, 울림없는 진혼곡도 아니길.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