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그의 패배를 기뻐하지 마라/ 세상이 들고 일어나 개자식을 물리쳤다 하더라도,/ 그를 배태했던 여편네가 다시 한번 발정기에 접어들었으니. - 베르톨트 브레히트
1943년, 무적 러시아 군대에 연패를 겪은 독일 군대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다. 그들에게 이미 독일 제국의 영광이나 군인의 의무 같은 고상한 이상 따위는 사라지고 없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싸울 뿐이다. 부대에 새로 부임한 귀족 출신 스트랜스키 대위는 전장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철십자 훈장을 타겠다는 야심으로만 불타고 있다. 군복과 군복이 상징하는 모든 권위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안티히어로’ 하사 스타이너는 히어로를 꿈꾸는 스트랜스키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결국 스트랜스키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스타이너와 그의 소대원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피비린내나는 복수를 결심한 스타이너는 유령처럼 부대로 돌아온다.
전쟁영화라는 특성상 고어(gore)장면이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리고 전작 <와일드 번치>나 <팻 가렛과 빌리 더 키드>를 통해 유혈낭자의 미학을 한껏 드러냈던 페킨파의 이력상 <철십자 훈장>은 지금껏 보지 못한 폭력의 풍경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블러디’ 샘 페킨파는 총탄에 맞아 내장이 튀고 탱크의 바퀴에 깔리는 너덜거리는 시체들뿐 아니라, 군인들의 내상까지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스타이너의 환각장면은 뛰어난 몽타주 교차를 통해 초현실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죽음에 근접한 부상자들만이 우글거리는 정원은 순식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지옥도로 화한다. 병원을 방문한 장군이 부상자에게 악수를 청하지만, 팔 아랫부분이 완전히 날아간 뭉툭한 살덩어리만 보일 뿐이다. 당황한 장군이 다른 쪽 손을 잡으려 하자 그 손 역시 살덩어리일 뿐이다. 옆쪽으로는 오랜만에 보는 진수성찬에 환호성을 지르며 식탁으로 덤벼든 군인들이 채소를 아귀처럼 집어삼킨다. 식물성의 재료로 이토록 육질의 느낌을 빚어낼 수 있는 건 페킨파만이 표현할 수 있는 폭력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군인과 간호사가 춤을 춘다. 그들은 꽤 행복해 보이지만, 주변에 음악은 흐르지 않는다. 죽음이 소녀를 끌어안고 있는 순간의 공포, 프란시스 베이컨과 살바도르 달리의 악수 같다고 해야 할까.
음악없는 춤은 살상장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죽음은 탱크의 굉음이나 포탄 소음과 함께 찾아올 때도 많지만, 아주 가끔 침묵과 더불어 춤추는 듯 순식간에 벌어질 때도 있다. 독일군이 다리 위에서 한가롭게 보초를 서고 있던 적군에 접근하여 목을 조르는 순간, 문득 의아해진다. 어떻게 강물을 건너가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이미 유령이 아닐까? 죽음의 신은 그렇게 소리없이, 아무 기척없이 어떤 징조도 주지 않은 채 달려들지 않던가. 혹은 러시아 여군들과의 이상한 만남을 떠올려보라. 남자들만의 세계에 정말 이상하게 끼어든 여성들의 작은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나는 격투장면은 어쩌면 싸구려 익스플로테이션 영화를 보듯 후끈한 관음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신화 속의 사이렌들이 군복을 걸치고 등장하여 굶주린 군인들을 하나씩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철십자 훈장>은 그렇게 전쟁에서 이뤄지는 폭력을 피와 살에 관한 페티시즘적인 쾌감으로 다루기보다, 인간의 생명이 어떻게 그토록 조심성 없이 소멸할 수 있는지를 깨달아버린 이의 노회하고 음울한 시선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샘 페킨파는 극단에 서서 그것에 대항하는 몸짓을 되풀이하기보다 이미 그것을 넘어선 늙은 사디스트인 신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진 사고다. 샘 페킨파는 주인공 스타이너의 입을 빌려 그렇게 선언한다. 더이상 어떤 신념이나 명분없이 오로지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현실에 너무 오래 머물렀던 사내들만이 내뱉을 수 있는 저주에 가까운 독백은 그렇게 영화 전편에 내내 이상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철십자 훈장>은 <지옥의 묵시록>과 아주 다른 방식으로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기이한 전쟁영화다. 김용언 mayham@empal.com
Cross of Iron, 1977년감독 샘 페킨파출연 제임스 코번, 맥시밀리안 셸, 제임스 메이슨장르 액션DVD 화면포맷 아나모픽 와이드스크린, NTSC오디오 돌비디지털 2.0 모노출시사 리스비젼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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