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들은 어떻게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는가게이머 그리고 P세대에 대한 오해와 진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보였던 젊은 세대가 갑자기 광장으로 쏟아져나오고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정치적 캠페인을 벌였다. 붉은 악마, 촛불시위,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나온 현상을 놓고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다고 입을 모았다. 해석과 분석, 이름붙이기가 쏟아져나왔다. 최근 한 광고회사가 발표한 ‘대한민국 변화의 태풍, P세대’란 보고서는 그 완결판처럼 보인다. 그런데 “월드컵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적극적 참여(Participation) 속에 열정(Passion)을 바탕으로 패러다임 변화를 이끌고 있는(Paradigm-shifter) 젊은 층”이란 분석은 정말 옳은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총체성 혹은 통일성이란 ‘신화’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P세대는 네티즌이며 게이머이다’라는 그럴듯한 가정법을 가지고 게임평론가 박상우씨에게 게임이 어떻게 새로운 세대를 만드는지 살펴보는 에세이를 요청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여전히 P세대를 오해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에 대한 이해는 당연히 영화의 주요 관람층에 대한 이해이기도 할 것이다. - 편집자
박상우/ 게임평론가
프롤로그 _ 세계가 게임이 되는 날
이제 더이상 삶에서 미디어에 의해 중재되지 않는 부분은 없다. 미디어에서 역할 모델을 찾아낸다. 삶을 어떻게 경험해야 할지 배워나간다. 미디어의 위치는 굳건하다. 다만 변하는 것은, 여러 미디어 중 어느 것이 절대자 노릇을 하느냐다. 아직은 TV의 위치가 절대적으로 보이지만 게임이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게임은 그저 미디어로 머물기에는 너무나 큰 야심을 가지고 있다. 게임이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삶의 경험이 아니라, 삶을 경험하는 세계 자체다. 어떻게 게임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는가? 그것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 시호는 발랄한 여고생이다. 학교에서 떠돌아다니는 소문들을 수집하면서 친구들에게 퍼뜨리는 게 가장 큰 취미다.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을 정보랍시고 떠들고 다니기는 하지만 시호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시호와 아카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소꿉친구들이다. 시호가 늘 말하듯 ‘썩은 인연’으로 묶여 있는 것이다. 내가 아카리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시호다.
시호와 나는 공부를 지지리도 못한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같이 보충수업을 받고 남을 휘두르기 좋아하는 시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우리는 아카리의 존재를 애써 모른 척한다. 시호는 어느 날 스토커를 따돌린다는 구실로 애인 노릇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좀더 진지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역설하는 시호를 보며, 우리를 둘러싼 감정이 단순히 연기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시호가 묻는다. “아니.” 우리가 묻고 대답한 건, 아카리에 대한 죄의식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한다.
<엔딩>
<스텝 롤>
<플레이 어게인>
아카리는 옆집에 산다.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소꿉친구라서 그런지 아직도 우리가 유치원에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늦잠 자는 버릇이 있는 나를 매일 아침 깨워 학교까지 데려다주며 친구라기보다는 엄마나 누나 노릇을 하려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은 친구 마사시 때문이다.
마사시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사귄 단짝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아카리와 사귀냐고 묻는다. 대답을 못하고 우물대는데 자기한테 소개해달란다. 아카리는 그저 소꿉친구일 뿐인데 왜 다른 남자아이에게 소개해주기 싫은지 모르겠다. 아카리와 나는 너무 일찍 만났다. 그리고 너무 오래 만났다. 서로를 이성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알고 지내온 10년은 너무 길다.
아주 조금 더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친구 이상 연인 미만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모두 무너질지 모른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이대로 머물 수는 없다. 아카리는 얼마 전 머리를 잘랐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다. 그러지 않았어도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 언젠가는 안락한 추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용기를 내야 할 때다. 오랜 세월 나에게 너무나 다정했던 사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나의 진심을 이야기해야 한다.
<엔딩>
<스텝 롤>
<유작>
다른 게임, 다른 자아
게이머는 게임 속에서 여러 삶들 사이를 표류한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고전 <투 하트>에서 만난 시호와 아카리는 ‘공략 대상’들 중 두 사람이다. 셋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들이다. 하지만 아무런 죄책감 없이 번갈아 두 사람과 사랑을 나눈다. 시호와의 사랑이 아카리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지, 아카리와의 사랑이 시호를 얼마나 외롭게 할지 알면서도 꺼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플레이 타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시호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플레이했다면, 다음에는 아카리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플레이했다. 두번의 플레이 사이에는 ‘엔딩’과 ‘새로운 게임 시작하기’라는 절대적 경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이머는 어떤 고민도 할 필요가 없다. 서로 상처를 입힐 두 가지 사랑을 마음놓고 할 수 있다.
삶의 표류는 하나의 게임에서, 같은 세계를 배경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프린세스 메이커>는 딸을 키우는 게임이다. 지극정성으로 딸을 돌봐 훌륭한 성인으로 키워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떠나보내고 난 뒤 느낀 기분은 실제 자식을 키우는 것 못지않았다. 특히 마지막 엔딩장면 “아버지. 그동안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시작하는 딸의 편지는, 수십 시간의 플레이가 주었던 피로를 한번에 없애주는 기쁨이었다. 모니터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임 속의 딸을 통해, 딸의 결혼식장 한구석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며 창 밖을 내다보는 아버지의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눈가에 어린 눈물을 닦아내며 게임을 종료한다. 그리고 다른 게임의 시작 아이콘을 클릭한다. 이번에 하는 게임의 이름은 <유작>이고 맡은 역할은 여학교 수위다. 학생들의 화장실이나 샤워실을 몰래 촬영해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한다. 이를 이용해 협박한다. 목적은 성폭행이다. 협박의 덫에 걸려들어 비참한 꼴을 당하는 것은 방금 플레이한 <프린세스 메이커>의 딸아이 정도 나이의 아이들이다.
<프린세스 메이커>와 <유작>. 실제 세계라면 정신분열을 일으킬 정도의 균열을 경험하면서도 게이머의 사고엔 죄의식이 들어서지 않는다. 두 게임은 각기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서 이뤄진다. <프린세스 메이커> 세계에서의 삶은, <유작>을 플레이하는 삶을 구성하는 세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게이머는 특정 게임을 플레이할 때마다 새롭게 탄생하는 주체다. <프린세스 메이커>의 주체 A군과 <유작>의 주체 B군은 우연히 ‘나’라는 몸을 공유하고 있을 뿐, 각기 상이한 세계에서 태어난 서로 다른 존재다. A와 B는 모두 자신이 탄생한 세계에서 그 세계의 법칙과 목적에 맞춰 적극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A의 세계에서는 딸을 소중하게 키워내는 아빠라는 존재로서, B의 세계에서는 한명의 여학생이라도 더 많이 성폭행하려는 파렴치한 범죄자라는 존재로서다.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할 때, 게임에서 그 주체는 ‘성공’을 인정받는다. 두 존재는 각기 주어진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성실한 삶을 산다. 두 세계를 이어주는 죄의식의 끈이 존재할 여지는 없다.
만일 어떤 게임 세계에서든 게이머가 동일한 주체라고 인식한다면, 그는 게임을 즐길 수 없다. 게임마다 주어진 세계에 걸맞은 즐거움의 원리가 존재한다. 어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도중 전에 했던 게임을 떠올리며 그때 살아가던 방식과 일일이 비교한다면 어떤 플레이도 즐길 수 없다. 아니, 가능하지 않다. 이런 게이머라면 오직 하나의 게임만 붙잡고, 하나의 엔딩만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이널 판타지>
일단 게임 속으로 들어가면, 게이머라는 존재는 현실의 ‘나’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다. 현실에서 나의 모든 행동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공간은 통일되어 있다. 하지만 개별 게임에서 주어진 세계는 모두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게이머의 삶이 이 세계들 사이를 표류하는 동안은, 현실은 현실 역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일 뿐이다.
여러 삶을 경험하고, 그 사이를 표류한다. 이는 게임만의 특징은 아니다. 다른 미디어 역시 삶을 떠돈다. 영화를 생각해보자. 모든 영화들은 독자적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자기만의 세계를 그린다. 원시시대부터 미래까지, 비천한 현실에서 눈부신 판타지까지, 영화가 만들어내는 세계 역시 어떤 공통점도 없는 세계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영화를 보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방금까지만 해도 노동계급의 현실에 눈물을 흘리다가도, 곧장 사탕발림 신데렐라 로맨스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관객은 객석에 앉은 채로 다양한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다양한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영화와 게임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바로 해석과 참여의 차이다. 관객은 영화를 본다. 거기 존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영화를 해석하여 수용한다. 해석과 수용의 주체는 스크린 밖에, 영화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스크린 밖은 관객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세계이고, 그 세계만의 자기완결적 법칙에 의해 돌아간다.
해석과 참여, 그 태생적 차이
영화는 빛이 되어 스크린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이미 관객이 살고 있는 세계의 한 부분이 된다.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관객에 의해 그 세계의 논리에 맞게 ‘해석’된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들을 보지만, 그 세계들은 모두 현재 관객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의 원리에 의해 해석된 뒤 수용된 것들이다. 각각의 세계가 가지는 이질성은 이미 이 해석과정을 통해 모두 상쇄되어 사라져버린다.
게임에서는 다르다. 게임은 게이머에게 단순하게 해석만을 위한 공간을 주지 않는다. 액션어드벤처 <GTA3>에서는 똘마니부터 시작해 도시 전체를 무대로 나쁜 짓을 하면서 성장해나가 잘 나가는 악당이 되는 게 목표다. 처음 화면은 호송차로 실려 가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갑자기 차가 전복된다. 이제야말로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 그리고 새로운 세대 [1]
게임 그리고 새로운 세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