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게이머가 손을 대지 않는 이상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가만히 멈춰 있다. 세계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는 온전히 게이머의 몫이다. 선량한 게이머라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내가 죄수지만 그렇다고 탈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보자. 게임은 멈춰 있다. 조금도 진행되지 않는다. 게이머와 게임 사이에 인내심 겨루기가 시작된다. 아무리 기다려도 죄값을 치르기 위해 교도소로 보내주지는 않는다. 답답해진 게이머가 움직임을 시작한다. ‘이럴 바에야 훔친 차를 몰고, 옆에서 태워다 달라는 다른 죄수나 도와줘볼까?’ 게이머가 움직이는 그 순간, 게임 속 세계도 언제 멈춰 있었냐는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게이머는 자신의 행동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방아쇠가 되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 세계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뛰어다닌다.
<투하트>
해석과 참여의 차이는 간단하다. 영화에서의 해석이 눈에 보이는 다른 세계를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 걸맞은 형태로 변형시켜 수용하는 것이라면, 게임에서의 참여는 게임세계가 돌아가는 법칙에 맞도록 게이머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이머에 대한 설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던 게이머를 어떻게 게임 속 세계에 맞춰 살도록 설득할 것인가? 게임과의 인내심 대결만으로 몇십 시간씩 플레이하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게임은 아주 교묘한 장치들을 발전시켜왔다. 흔히 ‘이중적 작가성’(dual authoship)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게임의 작가는 누구냐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과연 게임이라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누구일까? 게임제작자인가, 아니면 게이머인가? <파이널 판타지10>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방대한 대사와 컷신을 통해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게임에서 작가는 당연히 게임제작자로 보인다. 반면 <루나틱 돈>에서 게이머에게 주어진 건 세계뿐이다. 거기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를 결정하는 건 게이머 자신이다. 고독한 헌터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가족을 꾸려 성실한 가장으로 살 수도 있다. 희대의 범죄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다른 삶이 펼쳐져 있고,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제 게임의 작가는 누구일까? 게임 속 이야기를 만드는 건 누구일까?
게임, 당신이 작가다
이중적 작가성은 말 그대로 게임의 작가가 이중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에서 커다란 이야기를 쓰는 건 제작자다. 그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건축설계사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움직이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만일 화장실을 안방을 통해서 밖에 갈 수 없게 만든다면,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의지가 어떻건 안방은 프라이버시가 없는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만들어진 공간에 따라 움직이는 방식이 결정되고, 움직이는 대로 그 속에서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결정된다. 이 커다란 틀을 짜는 것이 작가로서의 게임제작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완성된 집 속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는 게이머의 몫이다. 주어진 세계 속에서 게이머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미시적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게이머 역시 게임의 작가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물론 제작자와 게이머는 같은 층위에 있는 작가는 아니다. 한쪽은 유도하는 주체고 다른 한쪽은 유도된 행동을 한다. 그래도 게이머는 작가다.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면 이 세계에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게이머가 주체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은 이처럼 게이머 스스로가 게임을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임은 이러한 장치를 벌써 20여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발전시켜왔다.
영화와 게임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해석과 참여의 차이는 크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다른 세계를 보면서도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러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게임을 하면서 기꺼이 그 세계로 뛰어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간의 표류는 그래서 영화가 아닌 게임에서 가능하다.
참여의 무게
게임의 경험은 독특하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세계는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즐거움도 줄 수 없다. 낯선 세계에 기꺼이 뛰어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주체성을 놀랄 정도로 고양시키는 경험이다. 그러나 이 주체성은 묘하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돌기 때문이다.
게이머는 게임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해서 뛰어든 것이라도, 재미없으면 부담없이 던져버린다. 앞서 말했던 <루나틱 돈>을 생각해보자. 오랫동안 심부름을 해서 돈도 모으고, 명성도 얻는다. 그동안 언제나 모험을 함께해왔던 그/그녀와 결혼을 하고, 누구라도 부러워할 모험가 커플로 이름을 날린다. 행복한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문득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고 느낀다. 곧장 게임을 나간다. 그리고 지워버린다. 그 속에서 펼쳐졌던 삶도, 혼자 나가버린 게이머를 기다리며 창 밖만을 바라볼 그/그녀도 한순간에 세상에서 사라진다. 같은 삶은 다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세상이 없어졌는데도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남은 건 또 다른 게임을 인스톨할 수 있는 하드디스크 공간뿐이다.
<GTA3>
언제나 게이머의 참여는 가볍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이뤄진다. 싫증나면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만들면 된다. 버림받은 아내가 식칼을 들고 찾아올 일도 없고, 전에 저질렀던 살인강도가 폭로되어 새로운 세계에서의 생활이 위협받을 염려도 없다.
게임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주체성은 그래서 조증 환자처럼 묘한 열기를 뿜는다.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세계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나서서 참여하고 즐거움을 얻어낸다. 새로운 세계에 열심히 적응해서 그 세계를 만끽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과거의 행동은 현재의 삶에서 어떤 의미나 책임도 없고, 지금 하는 행동은 미래의 삶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행동은 오직 현재 이 순간 자체로만 존재한다. 새로운 게임을 만날 때,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은 소멸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때 일본에서 ‘리셋주의’라는 용어가 화제가 되었다. 게임을 지나치게 하면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마고치>로 열심히 생명체를 키우다가도, 마음에 드는 대로 성장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키우던 캐릭터를 지워버리고, 새롭게 새로운 캐릭터를 키운다. 모든 것을 리셋하면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한번뿐이기에 소중한 생명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게임의 경험이 삶의 무게, 죽음의 무게를 줄인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리셋주의’는 대상으로서의 생명만 이야기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체로서의 생명이다. 현실에서 주체란 통시적 존재다. 30살이 되어서도 10대의 기억, 20대의 기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가 하면 지금 나의 행동이 앞으로 남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나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나의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 모두와 연결되어 있기에 하나의 행동을 하면서도 인생 전체의 무게를 느낀다.
게임 속에서 경험하는 주체는 그렇지 않다. 내가 뛰어들면 세상은 움직이고, 나는 언제나 원할 때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다. 내가 이전 세계에서 무엇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게이머라는 주체는 게임을 플레이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최근 P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열정과 잠재력을 바탕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는 세대”가 P세대의 정의다. 현상적으로만 이야기하자면, P세대만큼 게이머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주체를 잘 표현하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게이머들은 자신이 참여하지 않으면 세상이 1초도 움직일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행동한다. 게임이 만들어놓은 이야기의 장치 속에서, 참여를 통해 세상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경험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만큼 사람의 열정을 끌어내는 것은 찾기 어렵다. 게임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시스템을 통해 게이머의 주체적 경험을 고양시키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에는 한 가지가, 아주 결정적인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참여와 열정이라는 것이 지니는 무게다. 매번 사건에 참여할 때마다 그들은 새로운 주체를 경험한다. 그 사건들이 서로 모순되어 있는지, 사건들 사이의 비중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은 게임이 제공하는 세계만큼이나 독립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 이 자리에서 원하는 만큼 참여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지겹다고 느껴질 때 다른 곳으로 이동해 또 다른 무언가에 참여하고 행동한다. P세대는 게이머만큼이나 떠도는 주체다.
에필로그 _ 분명 모든 것은 변했다
삶의 짐에 눌려서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않는 소외된 삶과 어떤 무게도 지려 하지 않지만 자유로운 주체 중 어떤 것이 더 좋은가를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게임이 등장한 이후,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이 변하고 있다. 그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게이머라는 새로운 주체 스타일이 등장했다. 언젠가 세계가 완전히 게임으로 경험될 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주체, 참여, 삶의 무게, 이런 가치들이 모두 달라져 있는 삶의 방식이다.
게이머를 사로잡기네 멋대로 해라
게임은 영화보다 더 적극적으로 게이머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장치들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쓰이는 장치는 세부적인 측면에서의 인터랙션. 슈퍼 패미컴으로 출시되었던 남코의 <테일즈 오브 환타지아>는 게이머가 물가 근처로 가면 물속에 그림자가 비친다. 지금 수준에서 이런 묘소야 별로 어렵지 않겠지만, 당시로서는 이 장치가 가진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모든 그림을 도트로 찍는 상황에서 물 자체를 표현하는 건 어렵지만, 물가로 캐릭터가 지나갈 때, 물에 비치는 그림자라는 건 새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아무도 물에 비치는 모습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그것을 경험한 게이머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 세계가 내가 들어감으로써 이렇게까지 움직여지는구나 하는 점이다.
또 다른 방식은 자유도의 문제다. <폴아웃>의 경우처럼 게이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양할 경우, 게이머는 자기 스타일대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카리스마와 협상력이 높은 경우에는 문을 지키는 경비와 싸우지 않고 문을 통과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전투력이 높다면, 말보다는 무력으로 적을 물리치고 통과하게 된다. 더 재미있는 건 캐릭터의 능력에 따라 그가 구현할 수 있는 말의 폭도 변한다는 것이다. 그게 완전히 자유로운 정도의 변화는 아니지만, 몇 가지만 가지고도 게이머는 충분한 만족을 한다.
는 자유도라는 점에서 가장 새로운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우선 게이머는 도시를 다니면서 원하는 짓이라면 모든 걸 할 수 있다. 게임 내용과 상관없이 길가던 사람을 때릴 수도 있고, 차를 빼앗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못할 일이라면, 여기서는 착한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건 게임 자체의 목적이 나쁜 짓을 하는 데 있어서다. 어쨌든 <GTA3>의 경우 전체적 시나리오의 틀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나쁜 짓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게이머는 이 세계에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된다고 경험하는 것이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즐거움연애… 해보셨나요?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는 말 그대로 연애를 가상체험하는 게임을 총괄해서 말한다. 그러다보니 구체적 장르 형식으로서의 연애 시뮬레이션의 폭은 꽤 넓은 편이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을 필두로 한 정통 연애 시뮬레이션의 구조는 ‘개인의 수양’이 게임의 핵심이다. 좋아하는 여학생의 마음에 들도록 자신을 갈고 닦는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차츰 여학생과의 만남과 대화를 가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평소 조사한 대로 여학생의 마음에 드는 대화를 이끈다면 호감도가 높아지고, 최종적으로는 고백을 받게 된다.
이런 스타일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이라면, 어드벤처 형식을 띤 경우도 있다. 장면마다 에피소드가 벌어지고, 게이머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이다. 많은 연애 시뮬레이션이 이런 방식을 택하는데, 적절한 대답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이런 어드벤처 방식에 해당한다.
최근에 많이 사용되는 건 ‘사운드 노벨’ 형식을 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투 하트>도 여기에 해당할 텐데, 어드벤처보다도 텍스트성을 강조한 것이 이런 게임들이다. 사운드 노벨은 말 그대로 소설책을 읽는 기분으로 게임을 플레이한다. 어드벤처에서 선택하거나 고민해야 할 것이 많은 반면, 사운드 노벨은 선택의 폭이 좁다. 대신 많은 양의 지문이 나와서 게이머가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동시에 연애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방식의 가장 큰 장점에 해당한다.
연애 시뮬레이션은 게이머가 게임의 주인공이 되는 느낌을 주어야만 연애가 성공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도 크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게임 속 캐릭터와 주인공간의 감정 동화 장치를 많이 만들어냈고, 그것을 표현하는 그래픽적인 연출 기법도 발전시켜왔다.
게임 그리고 새로운 세대 [1]
게임 그리고 새로운 세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