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금살금 스며들어 확 뒤집어 놓는다
곽경택 감독은 어떻게 꽃미남 정우성을 ‘똥개’로 만들었나
곽경택 감독은 수차례 말했다. 좋은 연기를 담고 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이 기준은 그가 만드는 영화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친구>가 뿜어내는 에너지의 대부분은 배우들의 연기가 빚어내는 데서 기인한다. 그 공은 대부분 유오성, 장동건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몫으로 돌아가지만 이들을 조련한 건 다름 아닌 곽경택 감독이다. 지난해 <챔피언>을 내놓은 뒤 그리 만족할 만한 흥행 성과를 내지 못한데다 이후 갖가지 송사에 휘말려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그가 이번에는 ‘정우성 변신’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섰다. 한때 청춘의 아이콘이었던 정우성에게 ‘똥개’라는 촌스런 이름의 인물을 입힌 것이다.
자, 떠올려보라. 아버지가 달걀 후라이 하나를 더 먹었다고 밥상을 엎을 듯이 성질내는 정우성을, 눈은 구영탄 마냥 반쯤 뜬 채로 양손에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를 버무리는 정우성을. 상상이 가는가. 극과 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곽경택, 정우성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만났으며, 어떻게 서로를 변화시켰던 것일까. 7월3일, 새벽 강남의 한 멀티플렉스에서 기술시사를 본 다음 이날 오후 다시 얼굴을 맞댄 두 사람에게 묻고, 또 물었다. 곽경택은 정우성을 어떻게 똥개로 만들었으며, 정우성은 곽경택의 고문을 어떻게 즐겼는지를. 글 이영진·사진 정진환·편집 이다혜
Plologue - 썰렁한 조우
정우성 앉자마자 평범한 게 눈에 쏙 들어와요. “저 사람, 감독 맞아?” 싶을 정도로. <친구> 보면서 내가 상상했던 거하고는 너무 달랐고 지금까지 작업했던 감독들 스타일하고도 영 달랐으니까요. 심지어 저분이 현장에서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까지 들던걸요.
곽경택 처음에 보는데, 같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요. 우성이가 말은 없는데다 눈싸움은 안 지는 스타일이라 빤히 꼬나보고 해서 억수로 어색했다 아입니까. 그래 내 별로 할말이 없어가 조심스럽게 “집이 어뎁니까?” 그랬어요. (웃음) 외양도 훤칠하고 멋있으니까 내 입장에선 좀 켕겨서 그랬나. 결혼 전에 맞선 본 적이 없는 나인데도 뻘쭘한 기분이 딱 맞선 볼 때 심정이데요.
지난해 가을. 곽경택 감독은 경찰 아버지를 둔 ‘똥개’라는 별명의 양아치에 관한 아이디어를 지인에게서 얻은 뒤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할 참이었다. 그 무렵, 코리아픽쳐스 김동주 대표가 “밥을 한번 묵자”고 했고, 이 자리에는 싸이더스HQ 정훈탁 대표와 정우성이 동석했다. “초면의 배우들과 그리 잦은 만남을 가져보지 않은” 그는 당시 이 자리가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난처해서” 몇번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런데 강남의 한 일식집에서 이뤄진 정우성과의 대면은 그를 더욱 당황케 했다. “눈동자가 영 부담스러운기라. 다른 데는 몰라도 눈은 절대로 안 웃으니까….” 사람 대할 때 싹싹하기 그지없는데다 넉넉한 말주변으로 시선을 끌곤 하는 곽 감독의 첫마디가 고작 “집이 어뎁니까?”였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고여 있던 냉기를 느끼게끔 해준다. 사업 이야길 해야 한다며 두 대표가 “친해지라”고 이들을 압구정 한 카페에 떨어뜨리고 간 이후 감독과 배우는 몇 시간 동안 맨송맹송한 문답만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워야 했다.
Lesson 1: Human - 눈치 빠르게 사람 읽기
곽경택 세 번째 만나서 술 한잔 묵는데 그때부터서 따르던데요.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지만, 나랑 온도가 비슷하면 아무래도 일하기가 쉽잖아요. 뭐 좋아하냐, 주로 무슨 이야기하냐 뭐 영화 외적인 이야기하면서 가만 보니까 사람이 보여요. 나랑 비슷한 점도 보이는 거예요. 나처럼 눈치도 빠르고. 난 얼굴에 표시가 나고 우성이는 포커 페이스라는 것이 다르지만.
정우성 감독님이 시나리오는 아무 말 안 하고 매번 그냥 살면서 느꼈던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거예요. 근데 그건 저한테는 없던 것이었거든요. 배워질 수야 없는 것이지만 갖고 싶다는 욕심이 일었죠.
곽 감독은 성대모사를 곧잘 한다. 특히 앙드레 김은 정말 똑같다. 톤과 악센트를 놓치지도 틀리지도 않고 그대로 흉내낸다. 반달곰처럼 둥그스름한 눈매는, 꽤 꼼꼼하기까지 하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들어오자마자 숨도 고르기 전에, 먼저와서 소파에 앉아 있는 정우성에게 “어, 태권V 혁띠 찼네” 한다. 남들이 좀처럼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그는 누구보다 빨리 눈치챈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버지는 종종 “경택이 점마는 상대 비위 잘 맞추고 눈치가 너무 빨라가 장사했으면 잘했을 끼다”라고 했을까.
세심하고 발빠른 그의 관찰력은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의 인간 투시가 통찰에까지 이르렀는지는 모른다. 단,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성향과 행동유형 분류에 관한 한 그는 백과사전을 만들 만큼의 지식을 품고 있는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배우와의 만남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감독 vs 배우’가 아니라 먼저 ‘사람 대 사람’으로 맞장 뜨길 원한다. “새로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배우 정우성 보다 “아무말 없이 궁금증을 유발하는” 인간 정우성에 호기심이 일었을 것이다. 단, 그는 ‘사람’을 가린다. 그가 손사래를 치는 배우는 “내공이 좀 있다고 잔대가리 굴리는 사람”이다. 그럴 땐 자신 또한 “짱구를 굴려야 하므로 싫다”.
Lesson 2: Communication - 탐문을 통한 스며들기
곽경택 막상 촬영 들어가서 배우 찍으려고 그러면 막막해요. 그전에 미리 여러 번 만나봐야 해요. 이 사람이 화날 때 표정이 어떤지, 웃을 때는 어떤지 그걸 알아야잖아요. 또 발간 대낮에는 어떤지, 형광등 조명 아래선 어떤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어떤 이미지를 발하는지도.
정우성 낌새가 느껴지죠. 곽 감독님이 이런저런 질문을 해대는데 꼭 지뢰탐색기로 내 몸을 훑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배우라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고문이에요. 이 감독이 나한테 뭘 바라고, 이걸 바탕으로 나중에 서로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수만 있다면 그거야말로 즐거운 일이잖아요. 특히 촬영 직전 1주일 동안 리허설 하면서 감독님이 행한 탐문 수사는 좋았어요.
<닥터K>가 참패하고 나서 곽 감독은 배우들과의 사전 교감이 전무한 것이 패인이었음을 절감했다. “스타급 연기자들에게 내가 겁먹은 것도 있고. 그래서 영화 보면 어느 장면이든 인물들의 표정이 엇비슷하다. 자신들은 나를 믿고 몸을 맡겼을 텐데 난 한발 물러서 있었다”면서 그는 미안해한다. <친구> 촬영 직전, 그가 난데없이 매니저들을 떼어놓고 유오성, 장동건 등 배우 5명과 함께 로케이션 장소인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것도 두번 다시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일단 벽이 허물어지면 다음부턴 일사천리예요. 처음엔 서먹했는데 어느 순간 묻지도 않은 말을 저절로 건네는 사이가 되고.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누가 오바이트 하면 등을 두드려주기도 하고.”
캐릭터를 만든 다음에 캐스팅이 이뤄진 <친구>에서 <똥개>는 한발 더 나아간다. 정우성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고쳐 쓴 영화 <똥개>의 양아치 차철민은 곽경택적인 것과 정우성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성향들이 기묘하게 섞여 있는 캐릭터다. “별 질문 다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데뷔전까지 집중적으로 물었죠. 우성이도 솔직 담백하게 과거를 꺼내 보여줬고, 그 과정에서 이 친구가 리더십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개인 프라이버시니까 말할 순 없지만, 비유하면 이런 거 안 있습니까. 학교 다닐 때 어디 놀러가서 돈 떨어지면 슬그머니 비상금 내놓는 그런 든든한 친구 모습이 똥개에 섞여들어간 거죠. 사투리도 우성이 느린 말투를 고려해서 느리게 치달라고 한 거고.” 자주 술을 먹다보니 가끔 외모와 달리 “헤헤”거리는 모습도 발견하게 됐고, 감독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정우성의 실제 모습들을 채집해 똥개라는 캐릭터 군데군데에 수놓았다.
4가지 키워드로 본 곽경택의 연기연출론 [1]
4가지 키워드로 본 곽경택의 연기연출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