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 3: Relax - 스스로 무너지기
정우성 촬영이 3분의 1쯤 지났나. 감독님이 내게 “너, 철민이 맞지, 맞지?” 그랬는데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다 3분의 2쯤 촬영이 진행된 시점에서 감독님이 똑같은 질문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네, 맞아요” 그랬고.
곽경택 술을 먹였더니 다음날 촬영하는 데 폐차장에서 뒹굴뒹굴하는 거예요. 그거 보면서 아, 이제 정우성이 아니라 차철민이 다 돼뿟구나 싶더라구요.
<친구>의 장동건과 <똥개>의 정우성은 비슷한 욕망을 품고 곽 감독과의 작업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삶 대신 이미지의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채웠던 한 배우는 칼 맞고 쓰러지는 악역을 자처하면서 궤도권을 이탈했고 결국 자신의 영토를 늘리는 데 성공했다. “제목만 듣고서 출연을 맘먹었다”는 정우성 역시 그동안 자신을 옥죄어온 이미지의 갑옷이 갑갑했고 그것을 떨치고 싶었을 것이다. 촬영현장에서 이들을 연이어 마주했던 곽 감독은 어땠을까. “두 배우 모두 촬영현장에서 지나치게 긴장하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 겁이 나서 손에서 시나리오를 놓지 않았던 장동건과 마찬가지로 정우성 또한 과한 성실파였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 촬영 전날 술 한잔 하자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며 놀라던 정우성을 그는 근처 선술집으로 이끌었고 이튿날 정우성은 미처 주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촬영장소인 폐차장에서 뒹굴면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을 곽 감독은 정우성이 차철민의 옷을 입기로 맘먹은 날로 기억한다. <친구>에서 장동건에게 이마의 주름살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던 곽 감독은 이번에는 정우성에게 “눈은 놔두고 코 아래는 쉬지말고 자유자재로 놀려달라”는 페이셜(facial) 연기를 요구했다. 변신이란 건 단지 다른 성격의 배역을 떠맡은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몸짓을 보여줘야 하기에. <똥개>에서 얼굴이 무너진 정우성은 어깨 아래는 스스로 무너뜨렸다. 항상 어깨 한쪽이 처진 꾸부정한 모습으로 나오는 정우성은 자신의 형질변화에 대해 좀더 설명을 덧붙인다. “제가 원래 현장에서 선배님들한테 시시덕거리며 깐죽거리는 짓 안 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언제부턴가 촬영 때마다 김갑수 선배님한테 다가가서 살살 긁어대는 거예요, 글쎄.” 정우성은 곽 감독의 릴렉스 전략의 두 번째 수혜자인 셈이다.
Lesson 4: Tuning - 강하게 조율하기
정우성 감독들은 대부분 자기도 모르게 연기를 해요. 곽 감독님도 마찬가지였고. 근데 이번에는 좀 달랐어요. 감독님 연기를 보면 무슨 감정을 요구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저거 흉내만 내도 되겠구나 싶을 정도로. 한마디로 연기가 되는 감독이에요.
곽경택 그러니까 (감독 데뷔해서) 나 캐스팅하라니까.
정우성 (무시한 채) 사실 감독들이 배우들에게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따로 연습을 하진 않을 것 아니에요.
감독들의 연기 디렉션은 거칠게 분류하면 자유방임형과 스파르타형으로 나뉘어지는 듯하다. 곽 감독은 철저한 스파르타 식이다. 요구도 무척이나 까다롭다. 짧은 사투리 대사 한 토막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필’에 근접하길 원한다. <똥개>의 메이킹필름을 보면, 촬영 도중에도 곽 감독은 대사 톤이 맘에 들지 않으면 작전회의를 걸고서는 배우들에게 수십번씩 대사를 직접 반복해서 들려준다. 그럼, 배우들은 외국어 익히듯 수백번씩 중얼댄다. 똑같은 사투리라도 해당 장면의 주요 정서에 따라 강세나 어조가 달라지다 보니 이걸 녹음용 테이프에 옮겨서 배우들에게 들려주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현장에서 짬만 나면 “앵꼽다, 앵꼬봐”를 비롯하여 사투리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원어민으로서의 모든 것을 전수해주는 것 외에도 걸음걸이까지 일일이 간섭한다. 이러한 광경은 흔히 절대음에 근접하기 위해 거치는 튜닝 작업과 흡사하다. 그동안 자유방임형에 가까운 김성수 감독과 작업해온 정우성은 곽 감독과의 이런 작업을 “오히려 신선하다. 내가 모르는 나를 끄집어내주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곽 감독에게 배우의 연기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친구>에서 히로뽕을 맞은 채 벌벌 떠는 유오성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입 밖으로 털어놓는 장면은 실제로 연결화면이 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수차례 테이크를 감행했을 정도다. 원하는 감정이 제대로 살지 않으면 곽 감독은 재촬영도 감행한다. <똥개>에서 부자 관계인 김갑수와 정우성이 차 안에서 함께 잠복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의 경우, 곽 감독은 정우성의 2분 넘는 긴 사투리 대사 처리가 충분치 않다고 판단해서 다른 현장 상황을 핑계로 촬영을 도중 중지했고, 촬영을 뒤로 미루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죽고 싶나” 자취방 화장실에서 동수가 준석에게 처음으로 성깔을 내보이는 장면(<친구>)은 의도하지 않은 두 배우의 선의의 경쟁으로부터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어냈음을 기억하고 있는 곽 감독은 <똥개>에서도 아버지와의 면회장면이 테이크가 많아지고 이 때문에 정우성의 눈물이 바닥을 보이자 상대배역인 김갑수에게 슬쩍 다가가 대사 강도를 한톤만 높여달라고 해서 다시 눈물을 쏟게 만들기도 했다.
Epilogue - 잔인한 즐거움
곽 감독은 배우 연기에서만큼은 지독한 욕심쟁이다. 현장에서 곧잘 울고, 웃고 하는 그이지만 실제적인 느낌을 얻기 위해서 배우들에게 진짜 싸움을 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똥개>의 마지막 장면에선 실제 난타전이 벌어진다. 여기에는 액션장면에 꼭 있어야 할 합(合)은 없다. 정우성은 “상대와 맞붙는다는 것 외에 상대의 어느 부위를 몇대나 때려야 하는지 하는 약속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 한 장면을 위해 정우성과 김태욱은 무려 한달 가까이 연습을 했지만, 정작 이 장면을 촬영할 때는 팬티 하나만 입고서 아무런 제어없이 상대의 얼굴과 옆구리에 주먹을 날려야 했다. 이 장면에서 곽 감독은 전적으로 정우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때 이미 그곳에는 정우성은 없었다”는 곽 감독은 설정 하나를 던져주고, 아예 촬영장 바깥으로 도망을 갔다. 돌아와서 모니터를 확인한 다음엔 또 하나의 설정만 던져주고 다시 도망을 쳤다. “퍽퍽 소리가 나는데 그걸 직접 눈으로 보진 못하겠더라”는 곽 감독은 촬영 직후 곧바로 병원으로 직행해야 했던 김태욱과 얼굴이 피멍들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으깨어진 정우성에게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물론 3개월 동안 똥개로 살아야 했던 정우성의 답은 다르다. “전 고생한 게 아니라 즐겼어요. 정말, 맘껏 즐겼어요.” 정우성이 곽경택 감독의 조력으로 기꺼이 날개를 버리고 다리를 얻기로 맘먹은 전환점의 영화 <똥개>에 대한 관객의 평가는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곽경택 감독의 까다로운 오디션국가고시보다 살떨린다!
곽 감독은 배우 고르는 데 유난스럽다. DVD로 출시된 <친구>의 감독 코멘터리에서 발견한 사실이지만, 심지어 대사 한마디 없는 조직 보스의 운전사 역을 고르기 위해 국기원에서 여는 태권도 시합까지 찾아가, 꿈쩍 않을 듯한 풍채의 소유자에게 출연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가 주로 조·단역배우들을 찾아내는 장은 오디션. 멀리서 오는 이들에겐 차비까지 지급한다는 곽 감독이지만, 정작 시험이 치러지는 시간은 국가고시 면접장을 방불케 할 만큼 살벌하다고 한다. 카메라 앞에서 자기소개, 1분간의 자유독백, 제시한 대본 리딩 등 기타 오디션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진행이지만, 대신 오디션장에 대형 조명기를 가져다놓아 신인배우들을 긴장케 만든다. <똥개> 오디션장에는 정우성도 일부러 불러서 심사위원석에 앉게 해서 주눅들게 했다. 곽 감독은 “현장 가서 카메라 앞에 서면 갖고 있는 능력의 반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오디션장에서부터 떨면 어떻겠느냐”면서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연기 감별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
왼쪽부터 엄지원, 김갑수
똥개와 로맨스을 벌이며 긴장을 빚어낼 정애 역은 오디션 결과 최종 2명의 배우가 올랐으나, 엄지원이 낙점됐다. 당시 브라운관에서 한참 얼굴을 알리며 인기를 모았던 탤런트임에도 불구하고 2시간 넘게 이름표를 달고 오디션에 응하면서 “기필코 정애 역을 따내겠다”는 의지를 밝혀 높은 점수를 얻었다고. ‘삐리한’ 눈빛으로 곽 감독을 사로잡았던 진묵 역의 김태욱은 <친구>에서 도루코 역으로 나왔던 인물. 곽 감독이 총애하는 배우 중 한명이지만 하마터면 <똥개>에 합류하지 못할 뻔했다. <친구> 이후 몰라보게 홀쭉해졌던 그는 곽 감독의 요구대로 10여kg을 찌운 뒤에야 똥개를 괴롭히는 진묵 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똥개>의 제작자이기도 한 진인사 필름의 양중경 대표는 사기행각을 벌이는 조직의 보스로 나와 곽 감독의 영화에 최다 출연한 배우가 됐다.
4가지 키워드로 본 곽경택의 연기연출론 [1]
4가지 키워드로 본 곽경택의 연기연출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