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이란 것이 있고 <새마을노래>라는 것이 새벽잠을 깨우며 온 나라에 매일처럼 울려퍼지던 시절이 있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지긋지긋한 가난을 타파하고자 했던 몸부림으로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노래에 맞춰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별 보기 운동은 북한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우리 어버이들이 허리띠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고 죽자살자 악을 쓰고 기를 쓰고 돈을 벌었다. 불과 엊그제 같은 일이다. 그 엊그제와 오늘 사이의 그 짧은 순간에 달라진 대한민국을 보자하니 과연 우리는 팔자를 고치는 데 성공한 듯도 하다. 보릿고개 배고픔의 고통은 비만과 다이어트 문제로 변했다. 외국인들이 일하러 들어오려고 안간힘이니 돈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코리안드림. 그래, 우리도 이제 좀 먹고산다.
그런데 뭘 먹고 어떻게 뭘 하면서 살아야 잘사는 것일까. 어버이 세대는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라서 우리에게 잘사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오직 잘살기 위해서 얼마나 근검절약하고 인내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을 뿐. 그러고보니 잘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봤어도 ‘잘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런 걸 두고 문화평론합네 하는 양반들이 우리에게는 진정한 귀족문화가 없다 하는 소릴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한국형 귀족, 혹은 상류층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본 적도 상상도 가질 않는다.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에서는 천박하고 무식한 태생의 졸부 부부가 물질적 성공 다음에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모델이 될 만한 부류가 있을까. 교양과 학식을 갖추고 우아하고 기품있으며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예술의 향기를 음미하며 사는 사람들.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수준 높은 안목과 훌륭한 예술가를 키워내는 재정적 지원까지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채워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본 적도 없고 동경해본 적도 없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우아함’, ‘품위’, ‘ 교양’ 따위의 단어들은 일상용어에서 소멸된 지 오래이지 않은가.
영화 속의 졸부 아줌마는 적지 않은 투자를 해서라도 교양을 쌓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가련하기도 하다.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까지 섭렵해야 하고 가만히 앉아서 멀뚱히 듣고만 있어야 하는 클래식 음악도 작곡가와 지휘자를 줄줄이 꿸 줄 알아야 한다. 경박하지 않은 몸짓과 말투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다. 기준 모델이 있고 교재도 있고 가이드도 있는 셈이니 열심히 따라하고 연습해서 ‘내면’을 닮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델이 없는 경우는 어떠한가. 교양을 상실한 사회에서는 최대한 부티나게 차려입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과시할 수 있다. 말투나 대화 내용이 한심하고 천박하기는 너나할 것 없으니 그닥 문제되지 않는가보다. 그래서 명품에 환장한다. 카드빚을 내서라도 걸쳐야 한다. 입사시험 인터뷰하러 가는데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을 들어야 자기를 표현할 수 있단다. 팔자 고치기에는 뭐니뭐니해도 얼굴 뜯어 고치기도 빠뜨릴 수 없다. 아파트 이름이 노블리스 빌이니, 무슨 팔레스니 하는 이름으로 분양을 하니 진주 목걸이를 한 돼지들이 아귀다툼이다. 내면의 바람직한 동경의 대상이 없어 끊임없는 물질의 공급으로 삶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욕망은 브랜드의 먹이이다. 결국 교양도 명품 브랜드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의식주 모든 것을 유명 상표로 세팅하는 일. 그것만이 지금 이 땅에서 삶의 수준을 높여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잘사는(live) 게 아니라 잘 사는(buy) 것이겠지.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kongtem@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