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 아비인 걸 모른 채 때려죽이고, 그에 따라 어미를 어미인 줄 모르고 함께 자버린 오이디푸스는 모든 비밀이 밝혀지자 스스로의 눈을 찔러버린다. 왜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처럼 목을 매 죽지 않고 눈을 찔렀을까. 사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눈을 찔러서 장님이 되는 것은 산송장이 되는 행위였던 것이다. 눈으로 본다는 것을 그만큼 중시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운 조각을 제작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지의 시대가 구현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성서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신의 말을 어기고 따먹은 열매는 선과 악을 알게 해준다는 선악과였다. 그런데 그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선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무화과 나무로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이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먹은 건 선악과인데 하는 짓은 눈 밝아지기, 다른 사람 의식하기, 몸가리기인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눈이 어두워 앞에 있는 사람이 안 보였단 말인가.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든지 아니면 그들이 따먹은 선악과의 이름이 잘못 지어졌든지. 어쨌든 여기에도 눈이 관련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의 행동을 찬찬히 한번 살펴본다. 그들은 선악과- 그 이름이 틀리다 해도 일단 그렇게 부른다. 그게 싫으면 눈밝이 열매로 하든지- 를 따먹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를 의식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다른 이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타자 인식과 자기 의식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거다. 이렇게 보면 선악과는 타자 인식과 자기 의식의 열매이다. 여기까지는 별탈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하다.
그런데 성서에 따르면 선악과를 따먹은 게 아담과 이브의 잘못이다. 그 사건으로 낙원에서 쫓겨난다. 열매 먹고 눈밝아진 게 잘못인 거다. 열매 먹은 것이 악의 출발점이 된다. 이거 어딘가 좀 이상하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의식하는 것은 인간이 제대로 된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거울을 보고 그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 자기 자신인 줄 모르는 어린아이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아니라 아직은 동물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존재다. 같이 놀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한다. 물속의 강아지가 물고 있는 고기가 탐나서 그게 자기인 줄도 모르고 왕왕거린 동화 속의 강아지하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기를 보고 그게 자기인 줄 알았다는 게 악의 출발점이라니.
다른 사람을 의식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게 된다. 이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행복하게 하지만 동시에 나도 파괴하고 나도 행복하게 해준다. 더러는 선한 것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러한 타자 인식, 자기 의식, 그리고 그것에서 생겨나는 모든 행동, 즉 순진무구하지 않은 인간의 행위 전부가 바로 악한 것이라는 말일까.
그래서 성서는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철저하게 순진해지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눈을 찔러 산송장이 되지 않는 한,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우리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기 전에는 인간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일컫지 말라. 삶의 저편으로 건너가 고통에서 풀려날 때까지는”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 마지막을 보는 것, 누가 내 곁에 남아 있는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죽어가는지 확인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일이다. 신과 함께 가려면 눈을 감든지 눈을 찌르든지 해야 한다. 노래 잘 불러서는 어림도 없다.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