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판 바지를 입은 사나이에 대한 추억
‘세상에서 가장 질긴 바지는?’이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바로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의 바지’다. 화가 나면 녹색의 괴물로 변하는 과정에서 웃옷은 모두 다 갈기갈기 찢겨나가는데, 유독 바지만은 무릎 아래만 뜯어지고 멀쩡하게 남는 데서 나온 80년대 우스개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시 어떤 이들은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를 ‘스판 바지를 입은 남자’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비록 나 <소머즈> <원더우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두 얼굴의 사나이>가 방영 당시 인기를 누렸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가 최첨단 특수효과와 리안이라는 특출난 감독의 조합을 통해 <헐크>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이런저런 언론매체에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기사가 쏟아져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렇게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영화 <헐크>를 이해하는 데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의 역할은 크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시청 자체가 불가능했던 10대와 20대를 논외로 하더라도, 30대 이상 세대들에게조차 <두 얼굴의 사나이>는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저 ‘Don’t make me angry’라는 영문 대사와 함께 흘러나오던 주제음악과 데이비드 배너 박사가 녹색의 헐크로 변하는 과정 정도가 기억나는 전부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억의 파편들을 이렇게저렇게 조합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주인공 배너 박사와 괴물 헐크를 연기했던 두 전혀 다르게 생긴 배우들이 가진 강렬한 인상이다. 원하지 않는 사고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선한 과학자와 인간미는 전혀 없는 녹색괴물을 연기하던 그들의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던 것.
만화 <헐크>를 세부적으로 다룬 책 <Hulk: Incredible Guide>
TV시리즈의 두 주인공.(사진 오른쪽) 주인공 배너 박사가 헐크로 변하는 과정을 합성한 사진.(사진 왼쪽)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 팬페이지.
그중 배너 박사를 연기했던 빌 빅스비는 선하게 생긴 외모에 걸맞은 연기력으로 인해 한동안 미국 안방극장을 주름잡았던 연기자였다. 그가 처음 대중 앞에 선 것은 1961년 한 시트콤에서였다. 그뒤로 다양한 TV시리즈와 시트콤에 연달아 출연했지만, 그를 최고 인기배우의 자리에 올려준 것은 1977년부터 출연을 시작한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만화를 기반으로 한 그 TV시리즈에 출연하기로 했을 때 주변에서 만류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칼 융을 거론하며 <두 얼굴의 사나이>가 가진 정신분석학적인 특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평범한 배우들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연기생활 초기인 1967년부터 감독으로 활동을 했다. 실제로 <두 얼굴의 사나이>의 몇몇 에피소드는 그가 감독하기도 했다. 그의 그런 배우/감독 겸업은 말년까지 이어져, TV영화 <두 얼굴의 사나이 돌아오다>(1988), <두 얼굴의 사나이의 죽음>(1990) 등에서도 배우와 감독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3년 TV영화 <The Woman Who Loved Elvis>라는 작품의 감독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빌 빅스비가 전형적인 배우의 길에서 벗어나 감독으로 외도를 했던 인물이라면, 녹색괴물 헐크를 연기한 루 페리뇨는 보디빌딩 선수에서 배우로 전향에 성공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어릴 적 앓았던 병으로 청력을 거의 상실했던 그는, 자신감을 찾기 위해 시작한 보디빌딩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끌게 된다. 미스터 아메리카, 미스터 인터내셔널, 미스터 유니버스 등 주요 보디빌딩 대회를 석권했던 것.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나타나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이가 바로 아놀드 슈워제네거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그렇게 보디빌딩계에서 떠나게 된 루 페리뇨는 <두 얼굴의 사나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TV에 진출했고, 그뒤로 연기자의 삶을 살았다.
재미있는 것은 외모 때문에 역할이 상당히 고정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가 주로 맡았던 역할들을 보면, 헤라클레스, 신밧드, 글래디에이터 등 외모에 치중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보디빌딩계에서 강력한 경쟁자였다가 조금 늦게 연기자로 변신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다양한 연기 변신을 시도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그런 치우침은 그의 연기 생활을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제한된 연기 생활과는 별도로 청력을 잃어버린 나약했던 소년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감 회복에 대한 전문 강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부분. 실제로 그의 자신감 회복 세미나는 미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인기리에 개최되고 있는 중이고, 얼마 전에는 그 과정에서 정리된 생각을 자서전인 <My Incredible Life As The Hulk>에 담아 출간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한 인물이 가지는 두 가지 면을 훌륭히 연기했던 두 배우를 이제 한 장면에서 같이 보며, 과거의 향수에 젖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 개봉된 <헐크>에서 잠시 카메오로 출연하는 루 페리뇨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은 된 듯하다. 물론 영화 자체가 기대감을 충족시키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 팬페이지: http://www.incrediblehulktvseries.com
영화 <헐크> 공식 홈페이지: http://www.thehulk.com
만화 <헐크> 비공식 홈페이지: http://www.hulklibrary.com
루 페리노 공식 홈페이지: http://www.louferrign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