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B급!” 박래군은 늘 나를 이런 식으로 부른다. 지난해에 페미니즘 일로 괜스레 시끄러울 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나를 “마초!”라고 부르곤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내 성격에, 다른 누가 그랬다면 바로 코라도 주저앉혔을 것이다. 박래군이 그러면 그냥 “저 웬수” 하며 웃고 만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고 그의 그런 장난끼어린 조롱엔 무슨 대단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나에 대한 속깊은 염려와 조심스런 지지가 담겨 있다(설사, 그게 진짜 조롱이라 한들 어떤가. 현역 활동가인 그가 나처럼 입이나 놀리는 얼치기 좌파를 조롱하는 건 눈곱만큼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몇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를 의심했다. 그가 지나치게 좋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처럼 어디서나 좋은 사람 소리를 듣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옳음과 그름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근거하면,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대개 가장 세련된 처세술을 가진 위선자들이다.
박래군과 친해지면서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면서 옳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거니 싶어졌다. 나는 확실히 박래군과 친해졌다. 그러나 내가 박래군과 친해졌다는 건 박래군과 사적으로 친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가로서의 삶과 친해졌다는 뜻이다. 활동가도 인간인지라 대개 제 신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래군은 지난 십수년 동안 한국사회의 가장 궂은 부위에서, 빛도 이름도 나지 않는 그런 운동을 해왔다.
노동운동을 하던 박래군이 그렇게 된 일이 있다. 박래군은 1988년 ‘광주학살 원흉처단’을 외치며 제 몸을 불사른 박래전 열사의 친형이다. 동생의 주검과 그 주검이 남긴 신념을 수습한 박래군은 잇따르는 수많은 주검들과 그 주검들이 남긴 수많은 신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쓴 1991년을 전후로, 박래군이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죽음은 50여건에 이른다. 그는 ‘장의사’라 불렸다. 박래군은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기 이전에, 비탄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다.
“명동성당이라고? 엊그제 에바다*라며.” “야, 그게 언젠데. 너한테 전화한 다음날 들어왔어. 벌써 9일째야.” “그랬어. 네이스 반대 농성 얘긴 들었는데 박래군이 있는 건 몰랐지. 신부들이 뭐라 안 해.” “나가라 그러지.” “한심한 X들. 예수가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싫어했지.” “요즘 다 그런걸 뭐.” “몸은 어때.” “이번엔 준비를 좀 했어. 괜찮아.” “필요한 건.” “노숙 단식에 뭐가 필요하겠냐. 저녁에 한번 놀러나 와라.”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나 같은 놈이 가서 분위기나 흐려지지.” “어유, 겸손할 줄도 알아.” “나야 가진 게 겸손뿐이지. 내 맛난 것 한 보따리 싸가지고 갈게.”
싱거운 농을 주고받으며 전화기를 내려놓지만 속은 끓어오른다. ‘세상이 갈수록 지랄 같아지는구나. 6년 전에 전자주민증인가 하는 것도 여론에 밀려 폐기됐었는데 극우 반동들이 밀린다는 오늘 그보다 더 악랄한 네이스를 두고 하네 마네 난리니 온 나라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걸까. 싸울 수밖에,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불과 몇분 전 안온하던 내 속은 점점 더 뜨겁게 끓어오른다. 활동가는 분노를 실어 나른다.
* 지난 7년 동안 평택 에바다농아원은 ‘법이 멈추는 공간’이었다. 도둑들은 농아어린이 70여명을 인신매매하고 강제노동, 임금착취에다 국고보조금 및 후원금을 횡령했고, 6명이 변사했다. 지난 5월28일, 똥물을 뒤집어쓰고 폭행을 당하는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민주이사진이 에바다를 접수했다. 사람들아, 에바다를 기억하자.김규항/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