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신문 제11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0 ~ 1931
개봉때부터 연이은 난동과 시위 등으로 끝없는 논란을 일으켰던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황금시대>가 상영이 중단됐다.
<황금시대> 두달만에 막내려“결말부분 신성모독” 시위·난동 계속, 佛 상영금지 처분
1930년 12월11일,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황금시대>(L’Age d’or)의 상영이 중단됐다. 프랑스 경찰은 그동안 논란을 빚어본 이 영화에 대해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다. <황금시대>는 10월2일 개봉과 동시에 스캔들의 진원지가 됐다. 패싸움, 난동, 시위가 연이었고 극장 안에 사제폭탄이 터지는 사건도 있었다. 소동의 절정은 12월3일 일군의 보수주의자들이 벌인 스크린 습격사건. 가톨릭청년운동, 애국연합, 반유대인연합 회원들은 이날 개봉관인 스튜디오28에 난입해 스크린에 황산과 잉크를 던졌다. 여기에 동조해 우익 언론들은 “볼세비키영화의 부도덕성”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렇듯 <황금시대>가 격노를 산 것은 지극히 외설스런 이미지들로 부르주아의 도덕성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뉘엘은 ‘미친 사랑’과 성욕에 빠진 남녀주인공과 이들을 방해하는 부르주아의 법과 도덕을 대비시키면서, 배설물 같은 더럽고 외설스러운 이미지, 진흙투성이 길 위에서의 정사 등 노골적인 장면들을 즐비하게 깔아놓았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사드의 소설 <소돔 120일>을 각색한 영화의 마지막 부분. 브뉘엘은 대담하게도 <소돔 120>에 나오는 블랑쥐 공작을 예수처럼 그려놓았다. 예수 형상을 한 블랑쥐 공작은 13살가량의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가톨릭교단과 보수주의자들은 이 명백한 ‘신성모독’을 묵과하지 않았다. 반면 초현실주의자들은 성명서를 내 <황금 시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은행이 폭파되고 폭동이 일어나며 총기가 난사되는 시대에 검열을 통과한 신문기사를 읽으며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황금시대>를 보여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브뉘엘은 이 일련의 사태를 내심 반기고 있다. 이러한 스캔들이야말로 그가 기대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와 싸우는 도구”로 스캔들을 선택했다. 곧 그는 “스캔들은 착취, 식민지적 제국주의, 종교적 폭정과 같은 사회적 범죄, 부르주아의 위선 등 파괴되어 마땅할, 체제의 은밀하고 추악한 것들을 폭로할 수 있는 유력한 힘”이라고 주장해왔다. 그의 데뷔작 <안달루시아의 개>도 이러한 의중에서 만들어진 영화. 그는 이 영화가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고, 상영 도중 항의하는 관객에게 던지기 위해 미리 돌멩이를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안달루시아의 개>는 스캔들 대신 엄청난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초현실주의자인 앙드레 브레통은 “당신은 어느 편이오? 우리 편이오, 경찰 편이오”라며 그를 비난했다. 브뉘엘은 <황금시대>로, 어느 편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에이젠슈테인 “어디로 가나”반공산주의 단체 추방 압력에 미국비자 연장 거부
1930년 11월18일, 미 정부가 에이젠슈테인 일행의 미국 비자 연장을 거부했다. 정부당국은 이들을 추방하라는 반공산주의 단체의 압력에 못 이겨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에이젠슈테인은 미국을 떠나야 할 형편이다. 미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에이젠슈테인은 파라마운트의 초청으로 지난 4월 할리우드에 도착했다. 지난 1926년 모스크바 방문에서 에이젠슈테인을 만났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메리 픽포드는 미국으로 돌아와 입에 침이 마르게 그를 칭찬했다. 이에 혹한 파라마운트는 에이젠슈테인을 초청했다. 에이젠슈테인은 희망에 차서 미국땅을 밟았다. 파라마운트는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다. 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영화는 예외없이 제작이 거부되었다. 너무 길고, 사회적으로 민감하고, 상업성이 충분하지 않고, 너무 비싸다는 등등의 이유였다. 나아가 파라마운트는 아예 그와의 계약을 취소했다.
그렇다고 소련이 에이젠슈테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는 거의 쫓기듯 1929년 8월 소련을 떠났다. 그의 새 영화 <낡은 것과 새 것>이 몹시 못마땅했던(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영화의 결말을 완전히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유영화사 소유즈키노는 유성영화 기술을 포함한 해외 영화제작 기술 시찰을 명목으로 그를 외국으로 파견했다. 이에 에이젠슈테인은 프랑스를 비롯, 유럽 여러 나라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천의 얼굴’ 채니, 죽음의 마스크
‘천의 얼굴’로 보리스 카를로프, 벨라 루고시와 함께 공포영화 스타로 군림해온 론 채니가 다시는 벗을 수 없는 죽음의 마스크를 썼다. 1930년 8월26일 론 채니가 후두암으로 작고했다. 올해 나이 47살. 그의 첫 번째 유성영화인 <성스럽지 않은 성삼위>(The Unholy Three)가 유작이 됐다. 채니는 청각장애자인 부모와 소통하려고 애쓰면서 저절로 마임 기술을 터득했는데, 이는 그에게 중요한 연기 밑천이 됐다. 그는 주로 사지나 얼굴이 잘리고 뒤틀린 인물로 나와 그로테스크한 육체, 육체의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주었다. <노틀담의 꼽추> <오페라의 유령>이 대표적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제작사의 요구라기보다는 채니 자신의 취향”이라고 봤다. 토드 브라우닝은 채니의 이러한 취향을 제대로 살려낸 감독으로 이들은 <정체불명> 같은 공포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죽기 직전 채니는 손짓 발짓으로, 그러니까 마임으로 의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그는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제작준칙, 약인가 독인가
친사회적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리틀 시저>(1930년, 감독 머빈 르로이)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이 자막으로 삽입됐다. “칼로 흥한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
1930년 MPPDA가 발표한 제작코드를 둘러싸고 찬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MPPDA는 1927년 제정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주의해야 할 것’을 수정 보완하기 위해 제작법규협회(Production Code Admistration 이하 PCA)를 만들고 가톨릭 지도자인 조셉 L. 브린 신부를 수장으로 임명했다. 브린 신부는 예수파 신부인 대니얼 로드와 <모션 픽쳐 헤럴드>의 발행인인 가톨릭교도 마틴 퀴글리와 함께 ‘사회와 공동체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코드’를 만들었다. 이에 대한 찬반양론을 들어보자.
“영향력 큰 만큼, 책임 뒤따라야”
영화는 분명, 명백한 교육 혹은 선전의 목적이 없는 오락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접근이 쉽고, 감각에 직접 호소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넓은 관객층에게 더 큰 감성적 호소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만큼 책임도 더 크다.
특히 아이들이 받는 영향력은 직접적이다. 조사에 따르면 주간관객 9천명 중 14살 미만의 어린이가 1700만명이라고 한다. 이 아이들은 우리 세대와는 달리 영화를 보며 자란다. 영화가 이들의 세계인식과 일상적인 행동거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성적 호기심 많은 이들은 특히 영화에 묘사된 성적 행동에 열렬하게 반응한다. 스타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들의 성도덕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영화제작자들은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영화가 예술이라며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술은 인간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때라야 도덕적으로 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PCA가 말한 대로 좋은 예술이 될 때 영화는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반면, 나쁜 예술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역사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보아왔다. PCA는 어떻게 해야 영화가 좋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었다. 이를 따르는 것이 제작자의 의무이다. 관객에겐 볼 권리만이 아니라 보지 않을 권리도 있다는 것을, 이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테네시 하트/ 미시건주 중등학교 교사).
“너무 보수적, 현실을 등진 불구”
이제 우리에겐 영원한 족쇄가 채워졌다. PCA는 기획단계에서 개봉까지, 제작 전 과정을 감시한다고 밝혔다. 기획단계에선 시놉시스를 보고 영화화해도 괜찮은 소재인지를 판단하고, 제작 도중에는 촬영한 장면들을 검토하고, 완성 뒤에는 제작코드에 위배되는 장면을 삭제하도록 한다는 거다. 그래야 PCA 인가증을 내주고, 그렇지 않은 영화에 대해서는 벌금을 물리고, 불매운동을 벌이겠단다. 정말 엄청난 압력이다.
문제는 PCA가 정한 제작코드가 너무 보수적이고 완고하다는 것이다. 신부님들이 일방적으로 코드를 만들다보니 가톨릭의 보수적인 가치관이 고스란히 심어져 있다. 어떤 종교적 신념도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들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 이하를 그리라고 한다. 예컨대 부부가 한 침대를 쓰는 것도 금지란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결혼으로 끝나야 한다. 특히 PCA는 갱영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범죄의 세무묘사, 기관총이나 불법무기의 등장은 일체 금지된다. 갱영화에서 범죄자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하고, 법의 집행자가 범죄자의 손에 죽는 장면은 절대 등장해서는 안 된다. 살인이나 자살은 줄거리에 꼭 필요하지 않은 이상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런 제한들을 다 만족시키면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영화는 ‘불구’가 되고 말 것이다(찰리 브라운(가명)/ <리틀 시저> 제작진).
파라마운트-MGM 배우혈전
<X.27>에 디트리히 캐스팅, MGM <마타하리> 가르보와 맞불
마를렌 디트리히가 그레타 가르보의 라이벌이 될 수 있을까? 1930년 11월, 신작 <모로코>(감독 요셉 폰 스턴버그) 시사회에서 관객의 열광을 본 파라마운트 관계자들은 그럴 수 있다고 낙관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수백만달러가 들더라도 대대적인 홍보전을 벌여 디트리히를 제2의 가르보로 만들겠다. 가능성은 충분하다”라고 밝혔다. 그 판단의 시금석이 될 영화는 내년에 만들 <X.27>. MGM이 가르보 주연의 <마타하리>를 제작하기로 한 데 대한 맞불로 파라마운트는 디트리히를 내세워 <X. 27>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애초 파라마운트는 <모로코> 한편에 대해서만 디트리히와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은 요셉 폰 스턴버그의 주선으로 성사됐다. 원래 파라마운트 소속 감독인 스턴버그는 독일에서 만든 <푸른 천사> 프린트를 파라마운트에 보내면서, 디트리히를 추천했다. 스턴버그는 베를린 연극무대에서 이 무명의 여배우를 발견하고, 중년의 대학교수를 타락에 빠뜨리는 요염한 카바레 여가수 역을 맡겼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은, 영화 개봉 직후 증명됐다.
디트리히의 할리우드 입성기는 가르보와 흡사하다. 스웨덴 출신의 가르보 또한 1925년 <괴스타 벨링의 이야기>에서 그를 발탁한 모리스 스틸러 감독의 추천으로 할리우드에 건너왔다. 스틸러는 MGM과 계약을 맺으면서 “가르보가 가야 나도 갈 것”이라고 우겼다. 애초 가르보와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었던 MGM은 스틸러의 요구를 수락했는데, 그때 스틸러에게 “미국인들은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는 후문이다. 그 때문인지 미국에 온 가르보는 살을 많이 뺐다고. 디트히리 또한 가르보의 전철을 밟을 것 같다. <푸른 천사>의 카바레 무용수들이 유난히 뚱뚱한 까닭은 살집있는 디트리히의 몸매를 상쇄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까.
단 신 들
르네상스 시대 예감
1930년. 유성영화 도래 이후 관객 수가 크게 늘었다. 1927년 6천만명이던 주간 관객이 1930년에는 9천만명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박스 오피스 수입도 50%가 늘었다. 한편 지난 2년간 유성영화 제작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는 데에는 5억달러가 들어간 것으로 집계됐다.
나치 <살인자는…> 제목 바꿔
1931년 프리츠 랑의 첫 번째 유성영화 <살인자는 우리들 사이에>가 나치당의 압력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랑은 나치가 이 제목이 나치를 겨냥하는 것처럼 들린다며 압력을 가해오자 영화제목을 <M>으로 교체했다. <M>은 뒤셀도르프의 연쇄살인마 퀴르텐을 소재로 한 범죄스릴러로 연극배우 페터 로레가 주인공 살인자로 분하며, 영화 마지막 재판장면에서는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대거 우정출연한다.
채플린 “무성영화는 영원하다”
“무성영화가 사라진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찰리 채플린이 무성영화의 수호자로 나섰다. 1931년 1월25일 찰리 채플린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팬터마임과 코미디’라는 글에서 “무성영화는 팬터마임이라는 만국 공통어를 사용해왔으며, 발성영화가 극적 표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건 사실이지만, 20년 동안 팬터마임의 화법을 놀라울 정도로 발전시켜온 무성영화를, 유성영화가 결코 대체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성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날 것”으로 확신했다. 채플린은 지난해 말 잡지 <실버 스크린>과의 인터뷰에서 “100% 유성영화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무르나우 교통사고로 사망
1931년 3월11일 F. W. 무르나우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향년 42살. 무르나우는 로버트 플래어티와 함께 찍은 <터부> 개봉을 일주일 앞두고 샌타바버라 하이웨이를 달리다 이같은 참변을 당했다. <선라이즈> 이후 폭스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플래어티와 의기투합해 독립영화사를 차린 무르나우는 남태평양 타이티섬에서 <터부>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