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합동장례식을 치르지 그래
신파멜로 커플 동호회의 마지막 정모
인터넷 동호회 ‘애죽사모’(애인 두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와 ‘시애사모’(시한부 애인을 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들이 각각 정모를 가지기로 했다. ‘신파멜로’로 검색하면 결과페이지 거의 끝자락에 뜬다는 이 동호회들은, 40여년 전 ‘미울 때면 다시 한번’ 만나는 커플의 전설적인 명성 이래로 유구한 전통, 강력한 약발을 자랑한다. 이번 정모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끼는 ‘애죽사모’ 회원들의 건의로 열리게 됐다. 어쩌면 정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나름대로 속사정 많은 신파 커플들의 수다 한판.
‘애죽사모’ 회원 소개
‘오! 바람’본명 이은주, 커플암호 <연애소설> <하늘정원> 무직. 서간문학창작이란 고상한 취미를 가진 회원. 이메일이 아닌 우편으로만 편지쓰길 고집하고 있다. 카이스트 출신의 지성녀답게 말투와 태도가 똑 부러지고 솔직쾌활하다.
‘내가찾은닭살’본명 손예진, 커플암호 <연애소설> <클래식> ‘바람’의 친구로 역시 무직. 이 ID는, 초창기 정모 때 ‘내가 찾은 아이’를 간드러진 목소리로 불렀다가 얻은 것. 참을 수 없게 민망한 양무릎꺾기춤까지 췄다고. 평소 말수가 적고 얌전하다가도, 뜬금없이 반딧불을 잡아달라고 조르는 버릇이 있다.
‘향기샴푸’ 본명 장진영, 커플암호 <국화꽃향기> 샴푸 잘 써서 남편 잘 만난 여인. 프리랜서 번역일을 한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로 세상에 대해 시니컬하며, 한 남자에게 7년 동안 튕겼을 만큼 자존심계의 절대지존. 임신 8개월째다.
‘사과사세요’ 본명 김정은, 커플암호 <나비> 시골 깡촌 출신. 남자친구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사과를 팔러 다닌다. 기본적으론 툭하면 울어대는 눈치없는 푼수.
(왼쪽부터) 이은주, 손예진, 정진영, 김정은
‘시애사모’ 회원 소개
‘데스 따블’본명 차태현, 커플암호 <연애소설> ‘바람’과 ‘닭살’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남자. 택시 운전으로 먹고산다. 잠시 밤무대 가수를 뛰었다. 대학 시절 여자친구를 잘못 만나 엽기적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ID는, 정든 여인 두명을 한꺼번에 떠나보내야 한다고 한탄하며 지은 것이다.
‘아임 이도령’ 본명 조승우, 커플암호 <클래식> 중학교 때 춘향이라는 여자애를 좋아했다가 얻은 별명에, 채팅할 때마다 “후아유?” 타령해서 생긴 ID. 고등학교 때 만난 첫사랑이 ‘닭살’이다. 썰렁, 진지, 성실 그 자체. 전봇대 전등 스위치를 기막히게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우울한 PD’ 본명 박해일, 커플암호 <국화꽃향기> 라디오 방송국 PD다. ‘향기샴푸’를 꼬셔내기 위해 7년 동안 비오는 날만 골라 <우울한 편지>를 라디오 프로그램에 죽어라 신청했다. 7년 동안 매달려 얻은 여자가 시한부라는 사실에 늘 우울하다.
‘중국식 정원’ 본명 안재욱, 커플암호 <하늘정원> 그가 운영하는 병원 이름이기도 하다. 한의사를 꿈꿔 중국 유학을 갔으나 거기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아 신나게 즐기다 왔다. 한국의 유명 나이트를 전전하던 중 ‘바람’을 만났다. 냉정과 이성의 화신.
‘폼따구’ 본명 김민종, 커플암호 <나비> 폼나게 돈 벌어서 돌아오겠다고 고향 떠난 청년. 밤무대 가수로 잘 나갔으나 직업을 몇번 바꾸더니 일이 안 풀리고 있다. 편하게 농땡이 부리는 백수이자 몽상가.
(왼쪽부터) 차태현, 조승우, 박해일, 안재욱, 김민종
장소는 ‘데스 따블’이 일하던 카페. 두 동호회 회원들이 각각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무지갯빛 찬란한 ‘아기자기 패션’으로 꾸며졌다. 6년 전에 ‘편지’커플이 수목원 한가운데다 만들었던 노오란집의 명맥을 잇는 클래식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다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눈치다. 범인들은 접할 수 없는, ‘무지개문’ 너머 ‘하늘정원’에나 있을 법한 세계다. 예쁜 탁자에 둘러앉아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초록빛 싱그러운 자연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림같다.
속사정 1 : 판타스틱 첫사랑
오! 바람(이하 바람) 우리 다들 여전히 희고 곱네요. 향기샴푸님은 요즘도 밥 대신 요플레?
향기샴푸(이하 샴푸) 네, 하하하. 접때 우리 그이가 동네 가게에서 싹쓸이해온 요플레 무더기가 아직도 반 이상 남았어요. 삼시 세끼 요플레로 때워도 좀처럼 안 없어져요. (한숨)
내가찾은닭살(이하 닭살) 전… 하는 일도 없는데 자꾸 살이 빠져요….
바람 또! 또! (원망스럽다) 너 정말 왜 그러니! (눈물 그렁)
사과사세요(이하 사과) (엄한 분위기 속에 조심스레) 저어, 그럼… 피부관리들은 다들… 어떻게….
향기 꾸준히 케어받고 잠 푹 자고 음식 가려 먹고. 멜로드라마의 스펙터클은 딴게 아니고 바로 우리의 보디라인과 새하얀 얼굴이에요.
닭살 실은 제가 무리식이… 뭐더라?
바람 무리식이요법 부작용으로 인한 만성영양결핍 및 대(對) 타인시선과다예민반응에서 오는 신경성위염을 앓고 있대요.
사과 저만 스트레스받고 사는 게 아니었군요.
향기 어쩔 수 없어요. 생존전략인걸요. 남자들의 첫사랑 상대가 되려면. 못말리는 ‘첫사랑의 판타지’ 모르세요? 첫사랑의 설렘과 순수함은 ‘청순하고 맑은 여인’을 통해 완성된다고 하더군요.
바람 내 목표가 바로 그거에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 저랑 닭살은 가난해요. 하지만 없는 형편에 쪼개쓰고 아껴쓰면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애쓰느니, 타고난 미모나 살려서 멜로계에 한번 떠보고 말겠어요!
향기 카이스트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여자들은 배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니까.
속사정 2 : 꼭 죽어야만 해요?
데스 따블(이하 따블) 병원은 잘 되세요?
중국식 정원(이하 중국식) 몰라요. 그것보다도, 댁의 친구한테 자꾸… 정이 들려고 그래요. 마음주기가 두려워요. 내가 마음을 줬던 사람들은 모두 날 떠났어요!
따블 어디서 만나셨다고 했죠?
중국식 나이트.
우울한 PD(이하 우울PD) 허무해요. 7년 동안 매달려서 결혼한 여자가 죽어간다니… 내 첫사랑인데. 지하철 안에서 처음 그녈 봤어요. 착하고 예쁜 여자였죠. 그녀가 실수로 떨어뜨린 동전이 제 앞으로 굴러왔어요. 주워주니까 인사만 하고 가버렸었지만.
중국식 예쁜 여자였겠죠. 일부러 떨어뜨린 동전이고, 여자들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어요.
아임 이도령(이하 이도령) 어디서 들었는데… 예쁜 여자가 남자의 첫사랑이 되면 죽음을 저주로 맞는다는 설이 있대요.
중국식 우리 병원만 해도, 남자한테 첫사랑 고백 듣자마자 바로 불치병 걸려서 시한부 판정받고 입원 온 예쁜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죠.
따블 잘해주면 더 빨리 죽는다면서요.
중국식 당연하지. ‘남자들의 지고지순한 헌신과 기다림 그리고 다정함’이 심리적으로 그런 여성들의 병을 진척시킨다고 하더군요. 사랑의 완성이죠. ‘죽음으로 봉인되는 사랑.’ 순결한 여인과 헌신적인 남성의 그림 같은 사랑이 신선상태로 영구보존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둘 중 하나라도 죽고 나면 그 사랑은 더이상 오염될 수 없어요. 같이 죽으면 말할 필요도 없죠!
중국식 사실 1년만 사귀어봐도 못된 성질, 별별 희한한 습관이 통제불가능하게 튀어나오면서 환상이 모조리 깨지잖아요? 실체가 드러나기 전에 얼른 마무리하는 거예요.
우울PD 그래서 그런 건가요? 전 아내의 병명을 모릅니다.
따블 저도 닭살과 바람이 무슨 병 걸렸는지 몰라요. 어차피 치료할 것도 아니잖아요. 남자들의 슬픈 첫사랑에겐 불가피한 이별이 운명이에요.
속사정 3 : 사랑 빼면 남는 게 없는 내 인생
닭살 그래서 그런 걸까?
바람 뭐가?
닭살 아무리 내가 하는 사랑이지만, 이런 있을 법하지도 않은 슬픈 사랑에 제약이 너무 많다고 느껴져서 말이야.
사과 맞아요…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전, 그이랑 섹스를 안 해봤어요! (처절해 보인다)
닭살, 바람 우리도 그래요!
향기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며) 나만 해봤군요. (흐뭇해한다)
바람 심지어, 저는 고아예요! 직업도 없어요! 친구도 (닭살을 찌르며) 얘 하나예요! 이렇게 ‘단순한 인생’이 또 있을까요?
사과 저도 부모님 얼굴 몰라요.
향기 울 엄마 아빠는,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더욱 처량해지려면 두분이 죽어줘야 한다면서, 등장하자마자 기꺼이 교통사고를 당해 주셨어요. 그 덕분에 7년을 버틴 그이의 기다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완성되었죠.
사과 말도 안 돼요….
향기 된다고 생각해야 팔자타령도 덜 나와요. (한숨)
닭살 사랑 한 가지만 열심히 하고 살라는 하늘의 뜻 같기도 해요. 거추장스러운 거 다 빼줄 테니 예쁜 사랑만 열심히 가꾸렴….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아.
갑자기 닭살이, 벽시계를 쳐다보고 나더니 픽 쓰러진다. 여자들은 비명, 옆 테이블서 놀란 남자들은 벌떡. 사실 여자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누가 틀었는지 ‘피아노 선율로 시작되는 슬픈 음악’이 카페 안을 채운다. 따블이 뛰쳐나와 외친다. “닭살!” 하나 깨어날 맘이 없는 닭살. 어제 비를 맞아서 그런 것 같다며 따블이 재빨리 닭살을 들쳐업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음악은 이내 스트링 합주로 변하고 볼륨마저 커진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과가 목놓아 운다. 바람과 향기도 쉴새없이 눈물을 흘린다. 목을 놓건 흐느끼건 어떻게 울어도 예쁜 그녀들. 사과의 울음소리가 사과조각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신파스러운 장면이 한컷 완성된다.
바람이, 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발견하고 줍는다. 쪽지 겉면에 “나의 첫사랑으로 불어온 바람에게…”라고 쓰여 있다. 펼친다. 한심한 글씨체로 보아 따블이 쓴 게 분명했다. “바람, 사실 내가 좋아한 건 닭살이 아니야. 그동안 혼자 오해하고 많이 힘들었지? 바람,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이럴 수가. 바람이 중얼거린다. “이제야 이 사실을 알게 되다니… 이제야….” 바람의 뺨이 눈물로 범벅이 되면서도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살짝 곁들여진다. “하지만 다행이야…이제라도 니 맘 알게 돼서… 바보…!”
그리고 픽 쓰러지는 바람. 중국식이 뛰쳐나와 정신을 잃은 바람을 안고 바람처럼 카페 밖으로 달려 나간다.
사과가 신파스레 계속 우는 동안 이제사 도착한 폼따구가 다가와 함께 울어젖힌다. “에이씨! 울지마, 울지마아. 우리, 다 벗어나자! 여기서 도망가서 둘이 함께 고기잡으면서 행복하게 살자, 응? 우리 그렇게 하자!” 아기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폼의 품에 폭 안긴 사과. 두 사람은 곧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얼마 못가 두 사람은 바로 옆에서 들린 뻥튀기 기계 소리에 놀란 나머지 길바닥에서 심장마비로 즉사한다. 그 와중에 산고인지 불치병 통증인지 모를 뭔가 느끼기 시작한 향기가 끙끙대다가 우울PD에게 업혀 나간다.
홀로 남은 이도령,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금세 음악이 잦아든 카페를 나섰다.
‘시애사모’ 동호회 회원들이 자리한 가운데 합동 장례식이 치러졌다.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어차피, 그들과 그녀들만의 삶이고 사랑이었으니까. 이제 중국식, 따블, 우울PD, 이도령은 그들의 첫사랑을 영원히 가슴에 묻어 두어야할 판이다. 모두들 울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들은 떠났고 일편단심 그들은 이 땅에 남았다.
하나 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다행이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첫사랑을 추억의 책갈피로 꽂아두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 각자의 길을 나섰다. 그런데, 막판에 닭살이 따블의 등에 업혀 나가는 바람에 첫사랑을 빼앗기고 만 이도령만은 달랐다. 어느 쌀쌀한 겨울날, 닭살의 무덤 위로 작은 종이 한장이 날아들었다. “이도령, 첫사랑을 온전히 획득하지 못한 억울함에 화병으로 사망하다.” 박혜명 na_mee@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