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프로덕션 중심으로 커리큘럼 개편하자
한국영화산업 진단시리즈 최종회 - 넘치는 영화과, 활로는 어디에?
지난해 <씨네21>이 기획으로 다뤘던 2003년 영화 관련 학과 모집요강에 따르면, 학과 수와 입학 정원이 136개 학과, 1만459명에 이른다. 한해에 1만명 넘게 뽑는다면 곧 매년 1만명가량의 졸업생이 학교 밖으로 쏟아진다는 뜻이다. 한국 영화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 무리없이 소화하기란 버거워 보인다. 또 예술과 연계된 산업현장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제대로 키워내고 있는지의 여부도 문제다. 물론 대학이 산업인력을 키워내는 곳은 아니며, 법대를 갔다고 모두 판·검사가 되지 않듯이 모두 영화 일을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렇더라도 일반대학의 영화과가 어떻게 변모해야 하는지 따져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사 례 1
송낙원(34)씨의 인생 드라마는 현재 1인3역을 소화 중이다. 영화를 가르치면서(서경대 연극영화과 겸임 교수), 영화를 공부 중이고(영화이론 박사과정 중), 영화를 만들고 있다(감독 데뷔를 위해 한 제작사와 손잡고 시나리오 개발 중). 그의 학부 전공은 영화가 아니라 화학이었다. 씨앙씨에 등 ‘시네필’들의 단체에서 강좌를 들으며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대학 졸업 뒤 10년이 지나서야 그의 영화인생은 제대로 윤곽을 잡아가고 있다. 그것도 기나긴 외유를 경유해서야 가능했다. 왜 그랬을까?
대학 졸업 뒤 그는 곧바로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다. 뒤늦게 출발한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시 1년 과정의 아카데미는 철저히 실기교육 중심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4년제 대학과정보다 훨씬 밀도 높은 교육이었다. 눈만 뜨면 촬영을 고민해야 하는 실전에 가까운 상황이었으나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영화의 미학을 발견하고, 영화를 바라보는 눈을 키울 여유는 없었다. 그건 이론에 대한 결핍으로 느껴졌고 그를 중앙대 연극영화과 석사과정으로 나아가게 했다. 영화이론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영화평론을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연출에 대한 갈증이 문제였다. 곧 미국 AFI(American Film Institute)로 유학길에 올랐다. 수많은 학교 중에서 하필 이곳을 택한 건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라 상업영화 감독을 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2년 내내 할리우드 현역 시나리오 작가(“AFI가 아니라면 절대 맞대면조차 불가능할 작가들이었다”)의 지도 아래 시나리오 쓰는 법을 배웠다. 이어 UCLA의 ‘Extension’ 과정에서 1년 동안 영화 프로듀싱을 공부했다. 어느덧 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10년이 흘렀다.
01. 기획력, 인문적 소양을 중심으로
영화감독이 되거나 영화이론가가 되기 위해 송씨처럼 긴 우회로를 거쳐가란 법은 없다. 그러나 그는 영화를 인생의 좌표로 삼았다면 누구나 부닥쳐야 할 ‘벽’들이 어떤 것이지 잘 보여준다. 영화에 대한 매력과 소망을 뒤늦게 자각했을 때(혹은 사회의 그 무엇이 영화로의 초기 진로선택을 ‘원천봉쇄’했을 때), 영화에 대한 갈증을 말끔히 해소시켜줄 교육과정을 국내에서 찾을 수 없을 때,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가 약간 늦게라도 4년제 연극영화과를 고려하지 않은 데서 드러나듯, 국내 대학의 영화교육이 어떻게 개선돼야 하는지의 좌표 설정으로 귀착된다.
송씨는 “국내에 프랑스의 페미스나 오스트레일리아의 AFTRS(호주국립영화학교), 영국의 NFTS(영국국립영화학교) 같은 학교가 있었다면 굳이 유학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실기적 접근부터 세상을 보는 눈, 미학적 눈까지 동시에 키울 수 있는 학교가 아직 우리에겐 없다”고 했다. 잠시 눈을 외국으로 돌려보자. 미국의 경우, 자신의 적성에 따라 영화학교를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대학마다 특성화가 잘돼 있기 때문이다. AFI와 USC는 할리우드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돼 상업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UCLA와 NYU는 작가주의의 오랜 터전이 돼왔고, 칼아츠·시카고아츠·샌프란시스코아츠 등 미대 계열의 ‘Art Institute’는 실험영화의 산실이다. 이론으로 눈을 돌려 신형식주의쪽으로 파고 싶으면 보드웰 교수의 명성이 자자한 위스콘신대로, 문화연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UCLA나 텍사스주립대로 가면 된다.
그런데 외국의 사례에서 미국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좀더 일반적인 건 유럽형이다. 프랑스의 경우, 4년제 대학의 영화학과는 인문학과 ‘크로스오버’되는 현상을 보인다(국내에서 미진한 학제간 연구의 활성화는 여기서도 엿보인다). 서사의 문제를 다뤄도 사회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다가가는 식이다. 영상문화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도모하는 쪽이어서 이론 중심이면서도 시민교육 형태를 띤다. 실기쪽을 사실상 포기한 듯 보이는 4년제 대학과 달리 곧바로 현장에 투입 가능한 고급 인력을 양성하는 건 페미스, 뤼미에르 같은 국립영화학교나 극소수 사립대다. 현역 감독들의 상당수가 국립영화학교 출신이라는 건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등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현실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유럽형으로 가고 있다. 2년제, 3년제, 4년제 대학의 영화 관련 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그리고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시간이 흐를수록 보여주는 차별점이 그렇다. 사립대 영화학과의 취약점은 재정적, 인적 문제로 연출, 촬영, 시나리오 등 교육과정이 세분화되지도, 특성화되지도 못하는 데 있다(이는 일부 사립대 연극영화과에서 연출, 연기, 시나리오, 촬영 등 모든 분야의 스탭을 배출해야 했던 초창기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커리큘럼은 여전히 프로덕션과 포스트 프로덕션을 겨냥하고 있다.
일반대학의 영화학과 커리큘럼이 이제는 프리 프로덕션을 지향하도록 개편돼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기획력을 키워주는 교육이란 인문적 소양의 강화로 직결된다. 영화에 대한 테크닉보다는 영화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눈을 키우자는 뜻이다. <살인의 추억>이 80년대의 사회적·역사적 상황에 대한 나름의 분석없이 가능하지 않았듯이, 뛰어난 SF물이 과학 기술과 사회와의 상호 작용에 대한 통찰없이는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연출이나 시나리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촬영의 경우, 어떤 렌즈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테크닉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물을 바라보는 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박기용 감독·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
사 례 2
3년 전 심광현 영상원 원장(당시에는 영상원 교수)과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가 우연한 자리에서 마주쳤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일종의 산학협동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최근 촬영을 끝내고 후반 작업에 들어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리 프로덕션에 영상원 학생들이 참여하게 된 건 그래서였다. 2001년 겨울부터 봄까지 시나리오와 이론쪽에서 세명의 학생이 심광현 교수, 이유진 프로듀서, 이재용 감독 등과 함께 주 1∼2회씩 세미나를 해나갔다. 이론과 4학년 2명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8, 19세기의 사회적 풍습에 대한 다양한 조사를 벌였고 이는 세미나의 기초 자료가 됐다.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영화에 대한 컨셉을 다듬어나갔다. “학생들이 일주일에 한두번 리포트를 작성해오면 감독, 연출부가 함께 나눠서 읽고 물어보고 더 필요한 걸 주문했다. 감독이 이런 생활양식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성풍습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하면 그들이 더 연구를 해왔다.”(이유진 프로듀서) 이재용 감독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가옥구조, 내부 인테리어, 생활습관 등의 재현 및 응용에 상당한 정열을 쏟아붓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이 산학협동의 형태로 지원받았다는 건 별로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이 협동 작업은 시나리오를 전공한 영상원 1기생이 초고를 쓰는 데까지 나아갔다. 영화사가 이 산학협동에 들인 비용을 전체 제작비에 견주면 푼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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