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그 모두를 다 보는 건 쉽지 않다. <반지의 제왕>으로 피터 잭슨을 처음 만났다면 환상을 스펙터클하게 구현한 몽상가로만 생각할 것이다. <배드 테이스트>에서 보여준 집요하고 짓궂은 고어 마니아나, <천상의 피조물>에서 보여주는 미묘하게 떨리다 한순간에 폭발하는 열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얼굴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스퀘어의 간판은 단연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다.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일 뿐 아니라 영화 같은 연출, 화려한 CG 등 스퀘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파이널 판타지>에서 발견하는 스퀘어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된 미인이다. 여기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면 슈퍼 패미컴으로 출시된 엽기 코믹 롤 플레잉 게임 <반숙 영웅> 역시 스퀘어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게임과의 만남은, 늘 굽높은 구두에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차려입는 완벽한 미인이, 사실은 드레스 아래에 배까지 확실하게 덮어주는 늘어난 팬티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같은 충격이다.
<사가> 시리즈 역시 스퀘어의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사가> 시리즈의 뿌리는 사실은 <파이널 판타지>다. <파이널 판타지2>는 기존 일본 롤 플레잉 게임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시스템을 채택했다. 캐릭터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도구 사용에 성장값을 두는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장검을 많이 쓰면 장검 기술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장검 기술을 익힐 수 있다. 이 낯선 시스템은 기존 롤 플레잉 게임 유저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는 못했고 3편에서는 누락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의 가능성을 인정한 스퀘어는 이를 <사가> 시리즈에 도입했다. 이는 슈퍼 패미컴으로 이어졌고, 스퀘어뿐 아니라 일본 롤 플레잉 게임 사상 길이 남을 <로맨싱 사가> 시리즈가 탄생하였다.
플레이스테이션2로 나온 <언리미티드 사가>는, <사가> <로맨싱 사가>를 거쳐 플레이스테이션의 <사가 프론티어>로 이어진 ‘사가’ 시리즈의 적자다. 오프닝만 봐도, <파이널 판타지>의 스퀘어가 만들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3D그래픽이지만 <사가 프론티어2>에서 보여준 파스텔톤 애니메이션 느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질성은 그래픽보다는 오히려 시스템에서 두드러진다. 200쪽에 이르는 두터운 공략집이 게임 패키지에 딸려 있다. 이중 시스템 설명에만 육십장이 할애된다. 전투를 거듭하며 무기 숙련도를 높이고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 운이 좋으면 연계기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기와 술을 조화시키는 데 애써야 하고 스킬판, 마도판 시스템도 통달해야 한다. 화려한 볼거리를 전면에 배치하고 시스템은 단순화해서 가볍고 대중적인 게임을 만드는 요즘 추세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이동까지 기술 수준에 의해 제한되는데다가 전체 맵을 공개하지 않으며 맵 내에서의 이동마저 사실상 없앤 것에 이르면 실험정신이라는 딱지를 붙여줘도 충분할 정도다. 플레이스테이션2로 게임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낯선 것을 넘어 황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스퀘어의 얼굴들 중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것은 세련된 미인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시골 영감님쪽이다. 높은 제작비를 들여 많은 흥행 요소를 삽입해 만든 대작으로 좀더 많은 유저를 확보하는 할리우드풍 순환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자신이 믿고 있는 즐거움을 더 집요하게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과감한 실험에 몸사리지 않는 게임이 ‘사가’ 시리즈다. 슈퍼 패미컴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지만 <언리미티드 사가>의 고집스러운 얼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