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윌리스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자칼>은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나 본명인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보다는 자칼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졌던 테러리스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칼은 197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테러리스트로, 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를 공격하고 75년에는 석유수출국기구 회의장에 난입해 각료들을 인질로 붙잡고 경찰과 대치하다가 약 600억원의 몸값을 받고 사라진 사건으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었다. 그런 대형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번의 폭파와 납치 등을 통해 살해한 사람의 수만 83명에 이르던 그가 전세계 경찰과 첩보기관의 눈엣가시였음은 불보듯 뻔한 일. 특히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극좌파로 서방국가는 물론 친서방 아랍국에도 적대적이었던 그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특급 수배범으로 끝없이 쫓아다녔다.
그렇게 약 20여년 넘게 프랑스를 무대로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던 자칼이 잡힌 것은 94년 수단에서였다. 미국과 영국의 첩보기관들이 검거한 뒤 프랑스 정부에 넘겼고, 그뒤로 종신형이 언도되어 복역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복역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단 그를 변호했던 여성 변호인과 약혼하면서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에서 그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찬반양론이 터져나왔고, 지난해에는 그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오자 영화의 원작인 <자칼의 날>에 나오는 샤를 드골 암살 기도 장면을 흉내 내, 프랑스의 한 극우 청년이 시라크 대통령을 향해 총격을 가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 6월 말에는 자칼이 옥중에서 빈 라덴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문집 <혁명적 이슬람>을 출간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다시 94년으로 돌아가서, 암약하던 자칼을 잡아낸 주인공은 미국의 CIA와 영국의 첩보기관 MI6였다. 미국의 CIA는 유명해 더이상 이야기할 게 없을 정도지만, 영국의 첩보기관 MI6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기관이다. 물론 이안 플레밍이 시리즈를 출간하면서 제임스 본드를 MI6의 정예 요원으로 그리긴 했지만, 인물 중심인 시리즈의 특성상 MI6라는 조직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영국 정보기관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쟈니 잉글리쉬>
MI5의 공식 홈페이지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자칼
게다가 영국 정부 자체가 첩보기관에 대한 정보공개 자체를 꺼려왔던 것도 MI6가 CIA나 FBI, NSA 등 미국 정보기관 대비 낮은 인지도를 보인 원인이 되어왔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영국에도 MI6를 비롯한 여러 개의 정보기관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이 속해 있는 비밀정보국(Secret Intelligence Service) MI6와 보안국(Security Service)인 MI5가 가장 대표적이다. MI6는 해외정보활동이 주요 역할이고, MI5는 국내정보활동이 핵심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MI6는 미국의 CIA고, MI5는 미국의 FBI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일부 궁금해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아 붙이는 사족이지만, 얼마 전 개봉된 <쟈니 잉글리쉬>에 등장하는 MI7은 당연히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다. MI5와 MI6의 시작은 1900년대 초로 거슬러간다.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이 군대 내에 정보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1909년 비밀첩보부(Secret Service Bureau)를 설립한 것. 그러다 1916년 조직을 국내와 국외로 나누고 각각 MI5와 MI6로 부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MI는 Military Intelligence의 약자다. 재미있는 것은 암호해독이나 심리전을 담당하는 MI8, MI11 등의 조직도 당시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창설 이후 MI5는 주로 영국 내에서 암약하는 스파이들에 대한 감시와 검거를 주요 업무로 수행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 스파이들이 주요 목표였으며, 그 사이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감시의 대상이었다. 2차대전 뒤에는 당연히 소련의 스파이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 스파이를 감시하고 검거하기는커녕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이 MI5의 요직에 올라 소련의 KBI를 위해 일한 것이 밝혀지면서, MI5의 위상은 나락에 떨어지기도 했다. 또 북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등의 민족주의에 대한 대응에 깊숙이 간여해 세계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성격상 그 정확한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MI6의 경우 MI5와 유사하게 독일, 공산주의자, 독일 그리고 소련순으로 주요 활동을 펼쳤지만 주로 그런 국가에 스파이를 보내고 첩보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것이 차이였다. 문제는 영화 시리즈에서도 그려진 것처럼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이 사라진 지금, 영국이라는 나라의 대외 정보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임스 본드가 세계 제패를 꿈꾸는 미디어 재벌이나 별다른 위협이 안 되는 북한을 엄청난 괴물로 탈바꿈시켜, 사서 고생해야 하는 모습은 MI6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쟈니 잉글리쉬>가 이런 영국의 정보기관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만은 아니다. 세계를 제패한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정보기관의 위상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우리나라의 국정원을 둘러싼 지난 몇 개월간의 논란은 그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철민/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쟈니 잉글리쉬> 공식 홈페이지: http://www.johnny-english.com
MI5 공식 홈페이지: http://www.mi5.gov.uk
영국의 정보기관들: http://www.fas.org/irp/world/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