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의 몸엔 ‘자가온도조절장치’가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의상을 갈아입고, 잠시 화장을 고치는 것뿐인데 그는 자신의 몸을 뜨거운 남미의 태양같이 데웠다가, 이내 알래스카의 공기처럼 서늘하게 식히고, 또다시 만물을 소생시킬 따듯한 대륙의 기운으로 바꿔버리곤 했다. 그러나 사진기 앞에서의 짧은 공연이 끝나고, 현실의 소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공기를 일관되게 유지하며 오래 묵혀왔음직한 명석하고, 성숙하고, 솔직한 대답을 털어냈다. 전지현의 입을 통해 듣는 전지현, 그 10문10답.
01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도 심리적으로 힘들 때가 있겠죠? 일 하면서 너무 싫다, 힘들다, 괴롭다, 그런 걸 느낀 적은 솔직히 없어요. 스트레스 안 받고 일하는 건 복이죠. 힘들다고 느꼈다면, 아마 개인적인 이유일 거예요. 개인적으로… 저는 어느 순간부터 믿는다는 게 뭘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학교 이후로부터, 그러니까 일 시작할 때부터 그런 게 점점 없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 친구들하고 마음에 있는 이야기하고, 고민 털어놓고 그런 게 믿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믿는다는 것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지더라구요. 주위를 돌아보면서 내가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결국 스스로가 자신을 많이 닫아버리게 된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고 사람을 대하는. 그래서 친구도 없고. (웃음) 사실은 그게 힘든 부분이죠. 믿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들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되게 불쌍하더라구요. 하지만 그래서 받는 상처도 없다고 위안 삼아요. (웃음) 사실은 그런 거 아닐까요? 두려워서 내가 한발 떨어져 있고 멀어지는 거라구요. 내가 너무 약한 사람이구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기 싫어서 내가 먼저 도망가려고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하구요.
02 솔직히 스스로 생각할 때 ‘배우’ 전지현의 장단점은 뭘까요? 음… 단점을 먼저 말하자면요. 그 사이 제가 많이 불안했나봐요. 대학의 교수님에게 갑자기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하는 워크숍에 참가할 거라고 했거든요. 사실 일을 하면서 워크숍을 동시에 하기엔 너무 어렵다는 거 저도 잘 알거든요. 하루라도 연습에 빠지면 안 되니까, 그런데 무슨 마음에선지 할 수 있다, 할 거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미 팀들이 다 짜여져 있는 상태라 제가 중간에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라 교수님이 만약 정말 하고 싶으면 내년에 졸업작품을 기다리라고 하시더라구요. 물론, 지금 와서는 안 했기에 천만다행이다, 라고 생각해요. (웃음) 그런데 그때 왜 제가 갑자기 교수님에게 전화를 해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마도 내가 이제부터 잘못하면 내 자신에게 치일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너무 똑같은 것만 보여줄 것 같다는 느낌, 기초적인 극장 훈련을 통해서 좀더 강하게 자신을 만들고 싶었던 걸 거예요. 배우로서 단점이라면 그런 부분이겠죠. 솔직히 제 연기가 기초적인 훈련을 통해서 쌓아올려진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고등학교 때부터 하게 된 거니까. 그런 두려움이 든 게 사실이었던 것 같아요.
03 장점은 너무 많아서 말을 안 해주시나요? (웃음) 장점이 있다면… 사실 배우로서는 진짜 모르겠어요. 도 정말 각오하고 있구요. (웃음) 그냥… 평상시에는 나돌아다니는 건 되게 싫어하는데 열심히 하는 건 좋아하거든요. 집에 있는 건 좋지만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 시간에 뭐 하나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운동도 하고 피아노도 배웠고…. 아, 참 어느 스포츠신문에 제가 화교라고 나기도 했던데. (웃음) 전혀 아니구요. 그냥 언어에 대한 욕심이 많아요. 당장은 아니라도 늘 준비하는 배우라는 점이 장점이죠. (웃음)
04 또래들과는 많이 어울리는 편인가요? 학교가는 거 좋아하고, 친구들하고 수다떠는 거 무지 좋아하는데 일하다보면 그럴 시간이 솔직히 많지는 않거든요. 1, 2학년 때는 학교를 열심히 다녔는데 3학년 때는 <엽기적인 그녀> 찍은 이후로 자주 못 갔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애들이 너무 많이 달라져 있는 거예요. 교수님을 대하는 태도나 연기하는 거나 말투나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더라구요. 그리고 나만 멈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엔 공부도 중요하지만 애들이랑 같이 어울리면서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구나, 그러는 거 느끼는 게 학교가는 재미였는데, 이제는 뒤처져 있는 느낌이 들어요. 연극영화과니까 어떻게 보면 애들의 목표는 나일 수 있는데, 아니 사실이 그런데, 걔네들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기 위해 하루하루 너무 열심히 공부하고 살고 있는데, 나는 사실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
05 어느덧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잖아요. 배우 중에는 그걸 오히려 즐기는 부류가 있고 시간이 흘러도 늘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가요? 그 사이 카메라폰이 유행되어서, 학교에 가면 사실 화장실 가는 것도 두렵거든요. 동영상이 되니까 찍고 도망가면 그만이잖아요. 저는 배우니까 제 모습은 영화 안에서만 보여지고 싶고, 그것이 저라고 믿어주기를 바라요. 밖에서는 내가 연예인이고, 전지현이고를 다 떠나서 학생이면 정말 학생이고 싶고, 집에서 청소하면 예쁜 딸이고 싶고, 강아지랑 산책하면 그냥 한가로운 아가씨이고 싶고, 그래서 밖에서는 저를 잘 표현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언론에서 이러쿵저러쿵 기사를 쓰는데 어쩌면 덕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의도적으로 저를 규정하고 가두려는 것도 있지만, 그냥 기대하는 만큼, 생각해주시는 만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제가 상처받는 것은 몰라도 제 가족들이 상처받는 건 제일 화가 나요. 가족들을 위해 더 잘해야겠다,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06 왜 이렇게 사람들이 ‘전지현, 전지현’ 하는 걸까요? 글쎄요… 뿌듯한 점이라고 하면 제가 시작이었다는 거겠죠. 어떤 부분 문화의 선두주자가 되었다는 점일 거예요. <엽기적인 그녀>가 요즘 여성캐릭터를 주도하는 영화의 시발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누구보다 먼저 그런 영화를 통해 저를 선보일 수 있었다는 데 뿌듯함이 있죠. 그건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거고, 다시 세월을 돌이킬 수 없는 거니까, 그 어느 누가 해도 다 처음을 생각하게 마련이고, 누가 따라한다 해도 내가 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이 운이 좋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관객이 ‘제2의’도 아니고, ‘누구 같은’이란 수식어도 없이, 그냥 저를 저로 봐주시는 것 같아요. 행운이죠.
07 목표를 세우고 일하는 편인가요? 그렇다면 가장 근접한 목표는 뭔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때그때의 목표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목표가 늘 바뀌었어요. 왜냐하면 늘 다 했거든요. (웃음) 사실 별거 아닌 건데요. 어렸을 때는 버스나 옥외광고판에 사진이 붙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걸 이뤘고 그게 덤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왔어요. 다음 목표는 영화를 찍고 싶다는 거였는데, 와! 영화 찍는다! 하는 희열을 느낄 새도 없이 어느덧 무뎌지는 순간이 와버렸어요. 그 다음엔 영화 흥행을 꼭 할 거다라고 했는데 <엽기적인 그녀>가 그렇게 잘되었구요. 그냥 모든 게 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져버렸어요. 이후엔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했어요. 뭔가 목표가 있어야지 저한테도 동력이 생기는 거니까. 그래서 생각했던 건,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배우로 인정할 때까지, 그래서 큰 상을 받을 때까지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요.
08 <4인용 식탁>에서 유부녀에, 귀신을 보는 사연있는 여자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연이라는 사람은 기면증을 앓고 있는 환자고, 밝고 생동감 있게 살아갈 수 없는 역할이에요. 그저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괭장한 용기일 만큼. 저도 제가 이런 역할을 하게 될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엽기적인 그녀>를 끝내고 시나리오를 고르는 상황에서 이 시나리오가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어요. 물론 이 역할이 지금 제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니란 거… 저도 알거든요. 몇년 뒤에나 해야 할 역할인데. 그냥 하고 싶었어요. 지금 이 힘든 고개를 넘어가면 좀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물론 영화가 개봉하면 많은 사람들이 욕할 거라는 것도 알거든요. 하지만 저는 이 영화 찍는 내내 제 자신에게 ‘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스스로 훈련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요. 오히려 굉장히 힘든 길이지만 가장 가까이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어요. 이거 끝난 다음에 <엽기적인 그녀> 같은 거 해도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적어도 ‘아, 이걸 해서 이미지를 이렇게 바꾸어 보자’ 이런 거는 아니었어요. 저는 계산하면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모든 걸 편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고, 사실 그런 생각할 만큼 똑똑하지도 않거든요. 어쩌면 많은 부분들은 언론이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해요. 나는 그저 좋아서 한 거고, 시나리오 마음에 들어서 한 건데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고 저도 안 한 생각들을 대신 해주시잖아요. 저는 오히려 인터뷰하면서 그냥 그때 생각나서 한 건데 그게 살이 붙는 경우도 있고, 깎이는 부분도 있고….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건데…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09 인생에서 가장 큰 가치는 뭐라고 생각해요? 많이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제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면 정말 싫을 것 같거든요. 그렇게 산다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다 후회가 될 것 같구요. 아무리 바쁜 일에 쫓겨도 저는 중심이 돼서 흔들리고 싶지는 않아요.
10. 10년 뒤쯤이면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요? 물론 여자니까, 결혼을 했을 것 같고. (웃음) 어릴 때부터 일찍 결혼한다고 늘 말해왔는데 아마 일을 일찍 시작해서 그런 것 같아요. 늘 활동적이고 바쁘니까, 집에만 있고 싶다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들었나봐요. 그런데 요즘엔 연기라는 게 색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10년 뒤에도 계속 연기하고 있을 것 같아요. 음… 그리고 많이 나가고 싶어요.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 하나로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고, 그 사람들에게도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그것이 가능하단 생각이, 아니 가능했다는 사실이 기뻤거든요. 되게 뿌듯하기도 했어요. 사실 ‘세계 진출’ 그런 원대한 꿈은 아니구요. 어차피 시작도 내가 좋아하는 시나리오 골라, 영화 찍어서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알렸듯이, 앞으로도 재밌는 시나리오 골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요. 한국영화가 한국 안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아닌 상황이고, 내년이 아니라 10년 뒤니까. (웃음) 최근 몇년은 매일매일 일할 때마다 너무 즐겁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을 끝내고 나니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감이 생겼나봐요. 이제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은 우선 저에게는 ‘좋은 영화’예요. 다시 <엽기적인 그녀> 같은 영화를 해도, 공포영화라도 상관없구요. 사실 장르가 ‘멜로’인 영화는 많이 해봤지만 ‘멜로다운 멜로’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정말 좋은 멜로영화 한편 해보고 싶기도 해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