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만, 이 생각이 내 생각이냐
<매트릭스>를 처음 봤을 때 ‘저것은 장자의 나비 꿈을 화두로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진짜 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장자가 나비가 되어 나는 꿈을 꾸는 것이냐,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냐. 몸뚱이는 아무런 행위도 없이 인공지능 기계들이 지배하는 인큐베이터 속에 수경재배되고 있는 2199년- 인식의 바깥세계가 현실인가 아니면 질량 0의 가상현실 속에서 인생살이 온갖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인식하는 1999년이 현실인가. 어렵다. 장자 할아버지께서도 고민만 하다가 놓아버린 어려운 화두 아니던가.
하지만 2199년인가 1999년인가, 혹은 장자인가 나비인가 이렇게 둘 중 하나에 답이 있다면 다행인데 우리 사는 현실은 다른 쪽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으면서 ‘내가 사는 이 현실이 진짜 현실일까’라고 고민하기 시작하면 미릿속은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카오스 상태가 되어버린다. 혹시 내가 인식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 어떤 다른 존재에 대해서 프로그래밍된 것 아닐까. 우리는 사실 ‘심시티’ 같은 컴퓨터 게임 속의 등장인물들일지도 모른다. 게이머는 누굴까. 프로그래머는 누굴까.
우리 사는 세계는 가상현실처럼 소프트웨어적인 세계는 아니다. 질량과 에너지와 운동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현실세계라고 해둔다. 그런데 우리가 이 현실세계 안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감정적인 것들- 소프트웨어적인 것에 대해서 나는 자꾸 의구심을 갖는다. 사랑과 질투와 애정과 증오와 공포와 행복과 그 밖의 모든 감정적인 것들과 논리적인 것들과 사고방식들. 그것은 그 무엇보다 가장 인간적인 차원에 대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닮아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은 ‘프로그래밍하기 나름’이라는 것과 동의어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연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결국 우리가 믿는 현실이란 우리 생각이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이 생각이 내 생각이냐? 책상은 책상이다. 하지만 증오는 사랑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을, 생각을 새로 포맷하고 새로운 연산규칙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서 세계관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는 현실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이 생각하게 나름이니 인생이란 게 결국 몸이 태어나서 늙어 죽는 물리적 현상말고는 전부! 가상현실 같은 것 아니겠는가. 단지 영화 <매트릭스>보다 다행인 것은 뒤통수에 케이블을 꼽거나 아날로그 전화를 받아야 가상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는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가치관을 확 바꾸면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체인지업 조건은 자율적이고 자유롭게 오픈되어 있어도 워낙 초기 프로그램이 강력해서 스스로 버전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 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는 딜레마이겠다.
그런 한계를 엄청난 정신수양으로 넘어선 사람들을 우리는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내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된다. 뺨을 맞고 아픈 것은 현실이지만 맞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원수라는 증오는 가상현실이다. 정작 너희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 가상현실이니 사고방식을 바꾸면 거기서 벗어나 진실로 진실로 사랑 가득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이로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견고하게 설치된 ‘고정관념’ 때문이다. 정작 세상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이기심과 질투심과 온갖 종류의 욕!망!이다. 좋은 말로는 자기애이고 경쟁력이고 잘살고자 하는 희망이다. 희망과 욕망은 가상현실이다. 이 가상현실에 얽매어 인간은 직장에서 일생을 보내기도 하고 대학살의 전쟁도 불사한다. 아아, 이렇게 견고한 가상현실을 인간의 머릿속에 입력해놓고 세상을 돌리는 에너지를 뽑아내는 AI는 누구일까.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kongtem@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