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푸라민말고는 낯바닥에 뭘 발라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피부가 좋은가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진 않다. 그냥 안 발라 버릇하니까 안 바르게 되고, 그러다보니 습관으로 정착되지 않았을 뿐이다. 낯바닥에 뭘 바르고 안 바르고는 피부 상태에 달려 있기도 하겠지만,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바를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반드시 그렇다가 아니라 대체로 그렇다고 대답을 하게 될 텐데, 반드시 그렇다가 아니면 아예 안 해버리는 게 속편하다. 빡빡하게 굴 거 없이 그때그때 상황봐서 바르기도 하고 안 바르기도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기준이 있기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반드시 그렇다를 위해 조성해야 할 핵심적인 여건은 피부 상태도 마음먹기도 아닌 돈과 시간인데, 고작 최상층 표피에 불과한 낯바닥에 그런 걸 때려박을 만큼 넉넉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면, 또 더 나아가 속다르고 겉다른 표리부동층, 사기꾼 패거리에 낄 빌미를 스스로에게 조금도 허용치 않겠다면, 그냥 안 바르면 된다. 담배 끊기보다 쉽다.
대단한 짓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이 안 발라하는 버릇을 뿌듯해했었는데, 그런 헛생각을 단박에 박살내주는 걸 얼마 전에 봤다.
KBS1TV에서 2003년 5월25일 방영한 <일요 스페셜>의 제목은 ‘종군기자, 그들이 말한다’였다. 그중 한 장소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라마단 스튜디오.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은 의 종군 카메라 기자인 마거릿 모드. 그는 28년째 종군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10년 전 유고내전에서 저격수의 총에 턱을 맞아 화상을 입었다. 그는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도 정확하게 하지 못했다. 몇 가지 질문 중 하나는 여자로서로 시작되는 것이었는데, 그는 여자로서라는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화상 입은 낯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비본질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방탄복이었다. 카메라는 사태를 찍기 위해서, 방탄복은 그걸 찍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걸 계속해서 찍으려면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듯했다. 그는 종군기자에게 요구되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보편적 본질적 이념에 열정을 쏟아붓고 그것에 몸을 던져버림으로써 종군기자를 자신의 운명으로 삼아버린 사람이었다.
뭐가 좋다, 나쁘다, 뭘 제대로 한다, 제대로 못한다를 판별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어느 날 아침 뉴스에 세상의 모든 것이 두배로 커지고 늘어났다는 보도가 나왔다고 해보자. 이 뉴스가 맞는지 틀린지를 확인하려면 커지고 늘어나지 않은 게 적어도 하나는 남아 있어야 거기에 대볼 수가 있다. 이게 기준이다. 낯바닥으로 드러나는 표정, 거기에 발라진 화학약품, 혓바닥에서 튀어 나오는 말들, 손가락으로 써갈기는 글들이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을 짓고 바르고 떠드는 사람이 실제로는 어떻게 사는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가 말로 떠든 것을 실제로도 하고 있는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일전불사를 외치는 주전파는 전쟁 나면 나이 불문하고 총 들고 전선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 당장 날마다 5분 대기조처럼 살 것인지부터 확답해야 하고, 일상의 파시즘을 반대하는 사람은 과연 자기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사람 대접하고 있는지 체크받아야 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이는 어떤 종류의 권력에도 빌붙지 않았는지를 검사받아야 한다. 영화보고 감동받았다고 쓰는 평론가는 실제로 그래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 영화 키워주자고 그런 건지 실토해야 한다. 학자라고 자부하는 이는 정말로 그가 공부만 열심히 하고 잿밥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지 토설해야 한다. 모든 걸 명명백백하게 까발리지 않는 한, 이른바 야메가 사라지지 않는 한, 거짓 표정과 말장난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결국 세상은 밑도 끝도 없는 야바위 판이 되고 만다.
마거릿 모드의 삶, 그리고 그의 낯. 그것은 여자로서로 시작되는 살가우면서도 고상하면서도 전투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실제 삶을 검증하는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이가 말과 행위의 기준으로 삼을 만하다. 따지고 보면 악한 짓보다 더 사악한 짓은 낯간지러운 짓이다.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