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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
2003-06-25

대통령 선거날이던가. 나와 소주잔을 기울이던 선배가 환호하는 군중을 보며 말했다. “안 됐군. 그래도 실망하는 데 일년은 걸리겠지.” 내가 대꾸했다. “사람 스타일이 그렇게까지 안 걸릴 것 같아요. 이회창을 따돌렸을 때 김영삼한테 달려가는 거 봤잖아요.”

노무현의 스타일. 그게 언제나 나빴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노무현이 극적으로 대통령이 되는 중요한 힘이었다. 역겨운 스타일의 중년 남성들로 가득 찬 한국 제도 정치권에서 노무현의 솔직하고 화끈한 스타일은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저이가 대통령이 되면 이 역겨운 정치도 신선해지리라, 마법처럼.

오버의 연속. 그런 걸 두고 ‘입만 벌리면 실패한다’고 하던가. 대통령이 되자 그 스타일은 간단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솔직함과 화끈함은 단순함과 오만함으로 밝혀졌다. 하여튼 노무현의 스타일은 갈수록 무너지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은 갈수록 정처없어져간다.

그러나 노무현의 스타일은 여전히 노무현을 돕기도 한다. 노무현의 스타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스타일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정작 내용은 덮어두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그의 단순함과 오만함 앞에서 “무슨 말을 저 따위로 하는 거야”, 짜증이나 내고는 좀더 진지하게 노무현의 문제를 따져보기를 성가셔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잊는 건 노무현의 스타일이 살아나건 무너지건 그 스타일 속에 든 노무현의 정치적 내용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가 부시 앞에서 천박하게 말했든 위엄있게 말했든 정작 말하려고 한 바, 즉 한-미관계에 대한 그의 의견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정치적 의견은 그의 개인적 인격이나 스타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의 ‘사회적 인격’, 즉 이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개인적 인격이 개인적 행태로 반영되듯 사회적 인격(이념)은 사회적 행태로 반영된다. 그러나 사회적 인격(이념)은 매우 복잡한 사회적 이해관계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규정되기에 대개 더욱 오차없이 반영된다.

오늘 한 사람의 이념을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잣대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야말로 오늘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적 현상들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이 모든 착취가 모든 사회적 악행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이름으로 기획되고 집행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는 진보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매우 충성스런 정치인이다. 이라크 침략전쟁, 한-미관계, 노동운동 따위 이런저런 사회문제에 대한 그의 일관된 보수적 태도는 놀랄 만한 일도, ‘대통령이 되더니 달라져서’도 아니다. 그런 모든 태도들은 단지 보수주의자로서 그의 이념을 오차없이 반영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노무현의 개혁적 면모들도 대개 부풀려진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와 지역감정 문제에 대한 그의 ‘용감한 도전’을 되새겨보자. <조선일보>야 이미 그가 잘 보인다고 해서 잘해줄 가능성이 없는 상황인데다 안티조선 분위기도 무르익어 아예 맞서는 게 이득이었다. 지역감정을 무릅쓰고 부산에서 출마한 일도, 당내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그가 대통령 후보급으로 뛰어오르려면 획기적인 여론적 지지를 업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역시 당연한 선택이었다.

물론 그런 행동들과 관련해서도 노무현의 진심이 무엇이었나를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노무현과 사귀려는 게 아니라면, 그의 개인적 인격이나 스타일은 접고 그의 사회적 인격(이념)에 집중하는 게 좋다. 하여튼 오늘 노무현은 온 세상의 이목을 제 스타일에 집중시킴으로써,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보수 정치에 침을 뱉고 돌아설 수많은 순간들을 예방하는 보수의 전사로, 숭고한 보수의 전사로 살아가는 중이다.김규항/ 출판인